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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Dec 04. 2020

추운 겨울엔 사랑을 말하는 책을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같은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 

   -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손발끝이 시려워지고 이곳 저곳에서 캐롤과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면 유독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평소에는 즐겨보지 않는 로맨틱코메디 영화를 찾아보게 된다든지. 나의 경우에는 연어스테이크, 그리고 로맨스 소설이다. 오늘 가져온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은 소설이라기에는 지극히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이고, 로맨스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적절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건 이 작은 책이 당신의 마음에 어떤 불꽃을 지펴줄 거라는 것.




  


 <단순한 열정>은 한 여자가 유부남과 정신없이 사랑에 빠져서 그의 온 일상이 그를 기다리는 것, 그를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욕망하는 것으로 뒤집혔던 시간을 기록한 책이다. 짧게 요약하자면 여러 사람에게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책의 제목 그대로 "단순한 열정"이 불러내는 사랑의 기억들 덕분일 것이다. 





  <단순한 열정>을 이해하든 받아들일 수 없든지 간에 독자들은 필시 주인공과 함께 열정에 휩쓸려 사랑이 한 사람의 생애에 녹아들어 그를 밑바닥까지 뒤흔들고 지나가는 과정을 함께 겪게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온전한 상상력의 산물인줄 알았기에 더더욱) 나는 사랑의 상태를 매우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표현들을 보며 놀랐었다. 가령 이런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었다. 





(생략) 슈퍼마켓의 계산대나 은행 창구 같은 곳에서 많은 여자들 틈에 끼여 서 있을 때면, 저 여자들도 나처럼 머릿속에 한 남자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주말 약속이나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헬스클럽의 미용체조 강습, 아이들의 성적표 따위나 기다리며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금의 내겐 그런 종류의 모든 일들이 하찮고 무덤덤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는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생략)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사랑이 지나가고 난 뒤에 날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그 사람은 그런 사랑을(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이었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열정>은 그런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맗한다. 나는 이 태도가 두 발로 온전히 설 수 있는 성숙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순간에 이상할 정도로 고양되고 확장되었던 나의 세계에 대한 경험만을 고스란히 끌어안는 태도.





 책을 읽으며 그리고 책을 읽은 후에는 더더욱, 나나 나의 여자 친구들이 겪었던 감정의 결에 대해서 생각했다. 남성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도. 다행스럽게 아니 에르노와 사랑에 빠진 필립 빌랭이라는 청년이 그와의 사랑의 기억을 바탕으로 <포옹>을 집필했다고 한다. 나의 궁금증을 즉각 해결해줄 수 있는 답안지가 나와있는 셈이니, 다음에 읽을 책은 이미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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