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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Jun 23. 2021

세상의 고슴도치들에게 추천하는 책

<고슴도치>, 위기철 저


오랜만에 꼭 내 마음같은 소설을 찾았다. 이보다 더 위안이 되는 취미가 또 있을까?



어렸을 때는 책이라면 소설만 읽었는데, 그것도 마음에 들면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는데 언젠가부터 소설을 완독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반드시 읽어야 하는 걸작이라거나, 아니면 내가 작가의 엄청난 팬이거나, 몰입이 대단해서 책을 손에서 뗼 수 없거나, 하여간 끝까지 책장을 붙들고 있어야만 하는 강력한 동인이 무엇 하나라도 있어야 했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은 이유는 많고 많지만―귀여운 유진이, 통통 튀는 살아있는 캐릭터들, 수다쟁이들로 온갖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는 작가의 입담, 결말에 대한 궁금증 등― 내가 바로 고슴도치이기 때문이다. 인정하기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누가봐도 고슴도치인 것이 바로 나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숙맥이며, 머저리이고, 겁쟁이에, 약해빠진 그가, 가진 무기라고는 고작 강아지 한 마리도 위협하지 못할 가시밖에 없는 고슴도치인 그가, 연화를 지켜낼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세상은 용기있는 고양이의 것이 아니었던가, 소심하고 예민한 고슴도치 인생에 무슨 재미있는 반전이 나타나서 잘 매듭지은 결말이 나올 것인지 궁금했다. 용기를 얻고 싶기도 했다. 그래, 나도 비록 고슴도치지만, 내 심심한 일상에도 소금이랑 후추뿐만이 아니라, 대단한 변혁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고슴도치>에서 고슴도치는 주인공 헌제이다. 헌제는 아내와 이혼한 뒤 딸 유진이와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러나 소심한 헌제의 밋밋하던 일상은 고등학교 친구 세진과 수영장 강사 명신과 얽히면서 온통 복잡하고 소란스워진다. 그는 쉽사리 떼어낼 수 없는 그들에게 스며들듯 익숙해지고, 특히 명신과 가까워지면서 그와 함께 있기를 선택한다.



나는 <고슴도치>를 읽는 내내 이건 필시 자전적인 소설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작가가 고슴도치가 아니고서야 이 말도 안 될 정도로 답답하고 미련하고 예민해서 늘 가시롤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헌제의 내면을 이렇게 섬세하게 그려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00년도에 쓰인 작가의 후기를 살펴보니 내 말이 맞았다. 그리고 소설에서 드러나듯, 고슴도치도 발전의 가능성이 있다. 그의 등 뒤에 있던 가시가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이 그런 일을 한다.



나는 고슴도치다운 작가의 섬세한 표현력과, 거침없는 명신의 매력, 유진이의 아이다운 사랑스러움, 책 곳곳에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특유의 유머코드, 답답하고 미련하기 짝이 없는 사랑스러운 여러 고슴도치들에 여러 차례 반했다.



이 매력만점인 소설 <고슴도치>를 요약하자면 고슴도치가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배우는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 <아는 여자>를 묘하게 생각나게 했다. 사랑에 지나치게 진지한 주인공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사랑에 대해 탐구하느라 방황하고 괴로워하는데 바빠 코 앞에서 늘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랑을 알아보지 못한다.



요즘 고민이 많아도 너무 많은 머리 무거운 고슴도치인 내게 딱 필요했던 소설이다. 그래, 고슴도치는 명신이를 주위에 두고 철저하게 본받을 필요가 있다. 심각한 문제라도 단순하게 생각해버리는 것, 일이 닥치면 그때 생각하기로.



세상 곳곳에 숨어있거나 숨길 수 없는 고슴도치들, 외향적이거나 소심하거나 상처받았거나 한껏 움크린 채 절망에 빠져있거나 명신같은 이를 만나 혼란에 빠진 이 모든 고슴도치들에게 헌정하고 싶은 책이다. 필시 명신 같은 이는 이런 소설을 읽지 않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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