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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Aug 14. 2021

강화길 소설가의 단편소설, <가원>을 읽고

<가원>, 강화길 저

하지만, 왜, 어째서.

그 무책임한 남자를 미워하는 것이, 이 미련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보다 힘든 것일까.

<가원>, 강화길 저







어릴 적 난 커서 아빠랑 결혼할 거야, 하는 귀염성 있는 내 또래의 어린애가 나오는 TV 광고를 보곤 역겨워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삼교대 근무를 할 때면 늘 나를 돌봤고, 날 너무 예뻐해서 맨날 업고 다니는 바람에 안짱다리가 될까봐 걱정스러웠으며, 엄마 없이 맨날 흑염소 집에 가서 그 집 아줌마는 내가 엄마 없는 애인 줄 알았고, 아빠랑 함께 순풍산부인과를 보다가 엄마를 데리러가던 기억도 생생한데, 난 아빠랑 영 사이가 좋지 못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가 너무 어려웠다.



아빠는 자격지심도 욕심도 많은 사람이었고, 이왕이면 자식도 많이 낳기를, 그리고 되도록 아들이기를 바랐던 사람인데 달랑 하나밖에 없는 딸이 자기랑은 다르게 숫기도 없고 운동신경도 없어 보이니 영 마뜩찮았던 모양이다. 종이접기를 못 한다고, 친구들이랑 놀다가 비속어를 썼다고, 재활용 쓰레기를 그냥 버렸다고, 선생님께 특활을 안 한다고 직접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는 크게 혼났고 그때마다 그를 내 인생에서 없애고 싶었다. 나를 노려보는 그 눈이 내 가슴에 한이 되어 맺혔다. 너는 내 눈에 차지 않는 자식이라는, 너는 왜 이렇게 쓸모없냐고 말하는 그 눈빛은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것 같다.



없는 형편에 그는 입양까지 원했다. 활달하고 운동신경이 좋거나 공부를 유독 잘하는 모든 아이들이 그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는 그런 애들에겐 자기 딸을 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무래도 나는 잘못된 집에 도착한 부족한 애인가봐, 나로는 충분하지 않은데 딱 하나뿐인 애가 나라서 너무 미안하고 죄스럽던 마음은 그를 뼛속까지 증오하는 마음으로 변했다. 그는 내 꿈에서 많이도 죽었다. 그가 죽는 꿈에서 나는 가슴이 무너져내리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기도 했고, 그냥 성가실 때도 있었다.



내 인생에서 안 풀리던 모든 일이 아빠 때문인 건 아닌데, 나는 인생에서 돌부리에 걸러 넘어질 때마다 그를 원망하게 됐다. 이게 다 뿌리가 없이 둥둥 떠다녀서 그렇다고. 그런데 쌓이고 쌓이던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상담을 받던 중, 아빠가 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냐고 상담사는 물었다. 내 대답이 끝나고, 그가 한 말에 나는 문자 그대로 엉엉 울었다. 그는 아빠가 내가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게 아닐까, 말했다.



시간이 지나고, 아빠가 나를 향한 사랑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이라는 걸, 그가 내게 말도 안 붙이고 날 쳐다도 보지 않고 지나치던 그때도 날 너무 사랑했다는 걸 지금은 뼛속까지 아는데, 나는 여전히 그를 내 인생에서 내보내고 싶다. 내게 <가원> 속 연정의 할머니는 학습지 선생님이 0을 내가 특이하게(거꾸로) 그린다고 말한 뒤로 나를 때려가며 0을 남들이 보통 쓰는 방향으로 쓰도록 했던 엄마이기도 하지만, 누가 뭐래도 아빠다.



그런 아빠를 너무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원>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위로받았다. 고집 세고 바지런한 그를 쏙 빼닮은 것, 그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왔다는 것, 나를 압박해서 내가 지금 훨씬 편하게 사는 것, 모두 고맙고, 내가 때때로 느끼지 못하는 그를 향한 깊은 애정이 내 마음 속에 흐르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가 참을 수 없이 밉다. 내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서 날 향한 욕심도 꿈도 없기에 내가 대답도 못하고 우물쭈물할 때도 나를 그저 사랑스럽게 보던 큰아빠를 훨씬 더 사랑하는 게 내게도 더 쉽다. 사랑은 가끔, 어쩌면 언제나 이상한 방식으로 발현되어서 받는 사람을 헷갈리게, 주는 사람을 증오하게 만든다.



강화길 작가의 <음복>을 인상깊게 읽었으면서도 역시 평이 좋던 <가원>을 읽기까지 오래 걸렸다. 이번에는 <화이트 호스>를 빌렸으므로, 그의 다른 작품들도 즐길 수 있다. 이제 읽을 작품은 추천을 많이 받은 <손>. 가끔 금발머리에 이름은 발음하기도 어려운 인물들이 줄줄 나오는 외국 소설들을 읽다가 내가 뭘 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는데, 역시 주기적으로 한국 현대 소설을 읽어줘야 한다. 내가 발 디디고 선 이 땅의 문화와 정서, 언어로 쓰인 작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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