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도쿄
어제는 멋진 야경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한 채 눕자마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아침 6시, 알람이 울렸다.
원래라면 일어나서 아침 루틴을 해야 하는데.. 오늘만 알람 끄고 조금만 더 잘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갑자기 들려오는 전체 방송에 깜짝 놀라 눈이 떠졌다.
내용은 오늘 퇴소하는 사람들은 PCR 검사를 해야 하니 일어나라는 것이었다.
나와 다른 날짜에 이 시설에 들어온 사람들 중 오늘이 퇴소인 사람들에게 알리는 방송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들은 설명에도 PCR 검사는 아침 일찍 한다고 적혀있었던 것 같다.
방송이 끝난 후 귀를 기울여보니 같은 층에도 퇴소하는 분이 계신지 멀리서 노크 소리도 들리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부산스러운 느낌도 전달이 되어 온다.
나는 오늘 검사하는 날도 아닌데 조금만 더 잘까 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커튼을 열어보았더니 하늘이 굉장히 흐리다. 저 멀리 보이던 높은 타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연 하늘.
아, 어제저녁 잠깐 틀었던 뉴스에서 오늘 도쿄에 눈이 온다고 했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기온이 어떤지 습관적으로 날씨를 확인하려 어플을 켰더니 한국 출장에 지내던 동네의 기온이 나온다.
지역 설정을 바꾸면서, 그 동네의 아침 풍경을 떠올렸다.
출장으로 처음 가게 된 지역의 어느 동네였는데, 아침마다 스모그가 굉장했다.
맑게 갠 날도 물론 있었지만, 한 번씩 스모그가 끼면 정말 바로 앞에서 오는 사람의 형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했다. 그런 날은 미세 먼지도 나쁨이었는데, 기분 탓인지 매캐한 느낌이 너무 싫었다.
오늘 도쿄의 하늘은 스모그라고 하기보다는 흐린 하늘이었다. 또 습관처럼 미세 먼지를 확인하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나는 여기서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창문도 열지 못하는데 뭐.. 하면서.
침대에 걸터앉아 어제는 제대로 못 봤던 방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내가 지내는 방은 정말 최소한의 크기로 되어 있는데 공간 활용을 구석구석 신경 쓴 티가 난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왼쪽 편에 유닛 버스(욕실+화장실)가 있다. 정말 최소형의 욕조까지 있다.
따뜻한 물도 콸콸 잘 나온다. 이런 경우 문을 열고 닫을 때 변기의 위치가 중요한데, 일단 이 호텔은 그리 크지 않는 키의 내가 사용하기엔 불편하지 않다.
유닛 버스를 지나 안으로 들어오면 왼쪽 벽에는 행거와 거울이 있고, 오른편에 공간이 나오면서 데스크가 있고, 그 뒤 창 쪽 벽에 베드가 있다.
데스크가 붙어 있는 벽에는 크게 거울이 달려 있고, 서랍에 미니 드라이기와 컵, 인스턴트커피, 파자마 등이 수납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미니 냉장고가 있다. 냉장고는 스위치가 있어서 사용하지 않을 때는 꺼둘 수 있다. 물론 전기 포트도 있다.
침대는 세미 더블 정도의 크기로, 머리 부분에 몇 가지 스위치와 냉/난방 조절, 비상 손전등이 하나 달려있다. 그 위에 물건을 놓을 수 있게 되어 있고 창가 쪽에는 스탠드가 하나 있다. 이 스탠드가 위치 적으로나 밝기 적으로나 간접 조명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침대 머리맡 부분에는 쿠션 처리가 되어 있어서, 앉아 있기에도 좋다.
침대가 놓인 벽에 창문이 있는데, 레이스 커튼과 암막 커튼 두 장으로 되어 있다.
시설 격리라고 하지만 엄연히 호텔 격리.. 인 셈이다. 오기 전 걱정을 너무 했는데, 솔직히 이 정도면 방 컨디션에 관해서는 크게 불만은 없다.
간단하게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 8시, 또 전체 방송이 나왔다.
지금부터 도시락을 배부할 테니 절대 방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대로 잠시 대기했더니 한 20분 정도 지나서 또 방송이 나왔다.
도시락 배부가 끝났으니 마스크를 끼고 문을 열고 가지고 들어가라는 내용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밥을 배부당하는? 일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고리에 하얀 비닐봉지가 걸려 있었고 그 안에 도시락과 500미리 생수가 들어 있었다. 도시락 내용은 평범한, 그야말로 그냥 도시락. 밥이 있고 반찬이 한 4-5가지 들어 있다. 인스턴트 된장국은 저녁에만 주는 것 같다. 오늘 해야 하는 업무를 떠올리며 꼭꼭 씹어 먹었다.
오늘은 회사 시무식이 있는 날이다.
어제저녁에 PC 세팅을 하면서 인터넷 접속도 확인은 했다. 오후에도 팀 미팅이 있는데. 크게 문제가 없어야 할 텐데.
10시부터 온라인으로 시무식이 시작되었고 대표의 인사가 시작되었다. 약 두 시간 정도 이어진 시무식은 크게 문제없이 끝이 났다. 이제 곧 점심이 배부되겠구나, 하는데 문득 뒤돌아 창문을 바라보니 느낌이 이상하다.
이건, 눈이다. 눈이 오고 있다!
커튼을 열었더니 그야말로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 쌓인 걸로 보아 내리기 시작한 지 좀 된 것 같다. 이 동네는 야경도 예뻤는데, 눈이 내려도 예쁘구나. 눈은 사람을 낭만적으로 만든다. 창 밖을 보면서 도쿄에서 봤던 하얀 눈들을 떠올렸다.
어느 겨울,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교통이 마비되고, 신발이 눈에 젖어 발이 얼고,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내가 들어갔던 어느 가게에서 흔쾌히 내어주었던 전기 히터의 따뜻함. 뒤이어 들어오던 몇 명의 손님들과 함께 젖은 발을 말렸던 기억.
어느 날 늦은 밤, 오늘따라 밖이 왜 이렇게 조용하나 싶어 문을 열었을 때 소복이 쌓여 있던 하얀 눈을 봤던 기억.
눈이 올 계절이 아닌데 펑펑 내렸던 또 다른 날엔, 오늘 세상이 끝나려고 하는 거라며 친구와 기념하자고 케이크를 사러 나가 하루 종일 눈을 맞기도 했다.
그렇게 점점 딴생각에 빠져들 때쯤, 고맙게도 점심 식사 배부 방송이 나를 현실에 데려다줬다. 창 밖의 새하얀 풍경과 함께 점심시간을 보내고 업무에 복귀했다.
오후에 인터넷이 조금 말썽이었지만 무난히 일을 마치고, 저녁을 먹기 전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했다. 어제도 사실 씻을 때 잠깐 물을 받아 몸을 녹였어서, 욕조는 오늘로 이틀째다. 있는 동안 목욕이나 실컷 하지 뭐.
저녁이 되니 눈은 그쳐갔다. 어제와 달리 조금 여유 있게 창 밖의 야경을 감상했다. 반짝이는 불빛과 함께 도쿄에서 보냈던 수없이 많은 겨울날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에 와인 한 잔이 있었으면 진짜 좋았을 텐데.
아, 나 놀러 온 거 아니지..^^;
오늘은 눈이 왔으니까. 격리 첫 날도 잘 보냈으니까. 오늘 하루만 조금 감상적으로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