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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바람 Apr 26. 2022

기억

  부재(不在)하는 사람에 대한 옛 기억이 느닷없이 훅 소환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대체로 우리의 오감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시골 어느 식당에서 만난 두부 찌개의 맛에 엄마가 부엌에서 끓여 내오던 두부찌개의 맛이 떠오르고, 텃밭에서 키운 알싸한 깻잎 향에 들에 나갔다 돌아오며 소쿠리에 푸성귀를 담아 오던 할머니가 떠오르고, 무심히 켜둔 라디오에서 나오는 옛 유행가 소리에 사랑하던 그 시절의 추억들이 아련히 떠오르고, 첫눈 내리는 퇴근길에 뺨을 스치는 서늘한 기운에 밤늦게 귀가하는 고3 딸의 손을을 잡아주던 아버지의 손을 떠올리기도 한다.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메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섬진강 주변 어딘가(그곳이 정확히 어디였는지 정확히 기억도 잘 안난다)에서 멈춘 적이 있다. 강 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가슴 아래쪽은 물에 잠긴 채 무언가를 하고 있는 풍경이 인상적이어서 그냥 멈추었었다. 재첩을 채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강쪽으로 이어진 시멘트 길에는 경운기 한 대가 시동을 끈 채로 서 있었다. 아마도 채취해온 재첩을 싣기 위해 기다라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경운기의 조금 뒤쪽 한 켠에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고무신이 저렇게 놓여 있었다.


   하얀 고무신...  저 고무신의 주인은 누구일까?

   불현듯 시간이 꽤 오래 전으로 순간 이동을 하고 지금은 하늘로 가 계신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시골에 살던 그때 학교를 마치고 책가방을 맨 채로 집으로 달려오면 시골집 섬돌에는 저렇게 하얀 고무신이 한 켤레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두껍고 거친 손을 가진 분이셨고 불같은 성격이 있어 때로는 무섭기도 했지만 무뚝뚝한 사랑을 진하게 풍기시는 그런 분이셨다. 젊은 시절에는 배를 타기도 했었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마을 일에 앞장서서 나서는 호기로운 분이셨다. 그런 분이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을 견디지 못해 술로 하루하루를 버티다가 끝내 세상을 버리고 떠나신 것이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의 토요일이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들르던 학교 근처의 할아버지 댁을 그날따라 나는 가지 않았고, 그리고 그날  할아버지는 떠나셨다. 나를 통해 아버지에게 할아버지 상태가 안 좋음을 알리려던 할머니의 생각은 어긋나버린 밤이었다. 어린 나에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죄책감이 따라붙었고 장례를 치르는 내내 그 무게감에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발인일, 그리고 나의 초등학교 졸업식 날. 가족들이 등을 떠밀어 나는 혼자 졸업식을 위해 학교로 갔고 나머지 가족들은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기 위해 장지로 떠났다. 졸업식에서 받아온 상장을 보며 "며칠만 더 있다 가지. 그랬으면 손주 상 타오는 거 보고 가지..."라며 씁쓸한 한탄을 내뱉는 할머니의 말에 뒤늦게 나도 무너졌다.


  이제는 서울 생활의 시간이 고향에서 보낸 시간보다 더 오래되었고, 그래서 이곳 생활이 더 몸에 배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좋은 기억만을 남겨 추억으로 만든다고 뇌과학자들이 얘기하곤 한다. 이제는 어마어마한 죄책감의 무게에서도 조금은 벗어났고 어릴 적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소중한 추억들이 기억 속에 더 많이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거친 손으로 겨울마다 크~은 방패연을 만들어주었던, 눈밭을 뒹굴다 온 어린 손주의 손을 잡아 끌어 아랫목에 넣고 그 큰 손으로 꼬옥 덮어주었던, 그리고 늘 학교 끝나는 시간이면 흰 고무신을 신고 대문 앞에 있는 돌 의자에 앉아 목을 빼고 기다리고 계시던...


  그리운 이의 부재(不在)는 늘 그렇듯이 느닷없이 불현듯 느껴지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리움은 폭풍처럼 사람을 휘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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