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프리카#18]코로나19가 망쳐버렸다!

단단히 꼬여버린 아디스아바바 일정

by 돌바람

시작은 순조로웠으나...

2020년 2월 6일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의 아침은 순조로웠다. 미리 일정을 잡아둔 것이 있으니 아침 일찍 호텔 조식을 먹고 일정표대로 움직이면 될 일이었다. 에티오피아의 최고급 호텔인 만큼 조식 식당도 훌륭했다. 세련된 분위기의 기둥, 간접조명들과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인테리어가 식사의 분위기를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Ethiopian Skylight Hotel의 조식 식당의 외부 모습

조식 뷔페 역시 좋았다. 신선한 음식들과 직원들의 서비스도 좋다. 우리 일행들은 아침 7시가 넘어서자 하나 둘씩 방에서 나와 이 조식을 맘껏 즐겼다. 이날의 일정이 꽤 많은 만큼 넉넉히 많이 먹어 두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즐기는 호텔 조식인지라 한껏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맛있게 먹었다.

조식 식당 내부의 모습. 편안하고 맛있는 식사가 가능했다.


문제의 시작, 항공편이 갑자기 바뀌었다!!

식사를 다 마치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각자 나름의 준비를 하고 호텔 로비에 일행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총무님의 표정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날벼락같은 문자가 날아왔다는 것이었다. 항공편이 갑자기 바뀌었다고 항공사에서 문자로 통보해 온 것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로비에 모여 대책을 고민하는 일행들

원래 우리의 일정은 다음날(2월 7일) 밤 11시 55분에 홍콩행 에티오피아항공 비행기를 타고, 홍콩에서 인천으로 가는 대한항공 비행기로 환승해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홍콩행 ET873 비행기가 사라지고 다음날 새벽 비행기로 변경이 되었다는 문자가 온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간 상 홍콩에서 환승 비행기를 탈 수가 없게 된 상황이 만들어진다. 게다가 이 두 편의 비행기는 연결된 환승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환승을 해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귀국길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는 것이었다.

에티오피아에서의 원래 일정은 이랬다.

로비에 모인 일행들이 걱정을 하며 이런 저런 방법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항공편 일정 변경 때문에 귀국길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터라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만 했다. 항공편 예약 앱에 들어가서 다시 살펴보기도 하고 대한항공에 연락하여 비행기 변경을 알아보기도 하고,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연락해 대한항공에 직접 전화해서 항공편 변경을 알아보기도 하고... 그런데 홍콩행 비행기와 인천행 비행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이게 해결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로비에 앉아 이것저것 알아보고 전화하고 검색하고 하는데 도저히 해결책이 나오질 않았다. 이러다 진짜 집에 못 가나... 시간이 점차 지연되면서 이날 아디스아바바 시내 투어는 일단 보류를 하고 에티오피아 항공 티켓 오피스를 직접 찾아가서 해결해보기로 했다.

에티오피아 티켓오피스에서 직원에게 이것저것 문의도 하고 항의도 했다.

티켓 오피스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도 에티오피아 항공사 그룹에서 운영하는 호텔이라 호텔 바깥으로 돌아서 걸어 가면 바로 티켓 오피스가 있었다. 순서를 기다려 우리 차례가 되자 우리의 상황을 설명했다. 특히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이렇게 변경된 비행기로는 환승시간에 맞출 수가 없다고 애절하게 얘기했다. (사실 '애절하게'가 제대로 표현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영어 수준이 너무 별로였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얘기만 반복했다. 급기야 화가 나서 '너네들이 일방적으로 항공편을 변경해서 우리가 귀국 못하게 생겼는데 이렇게 손놓고 있으면 어떡하냐?'며 강하게 얘기를 했다. 그래도 이것저것 컴퓨터로 뭔가를 두드려보기만 하더니 계속 '별 수가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별다른 방법이 없어 암담한데 길가의 꽃은 어여쁘기만 했다.

그렇게 오전 내내 애를 써보았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추측하건대 이때 점점 번지기 시작한 코로나19가 홍콩까지 번졌고 그곳에서도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아무래도 항공사에서 홍콩 편을 없애고 다른 곳을 경유해 가는 노선으로 바꾼 듯했다. 그러고 보니 에티오피아에 오자마자 만나는 현지인들은 우리를 보고 '너네 중국인이야?'를 먼저 물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저 외국 여행을 가면 의례적으로 듣는 중국인, 일본인 소리라 그런가보다 했는데 일본인임은 안 묻고 중국인인지만을 물었던 것이 떠올랐다. 결국 코로나19가 이날 우리에게 다른 방식의 폭풍을 일으킨 것이었다.

호텔에서 마냥 기다리던 일행들도 하나둘씩 티켓 오피스로 와서 상황을 살펴보고 했지만 결국 아무런 대안도 얻지 못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와 '어떡하지...' 하며 허탈해했다. 총무님이 아침부터 아예 공항을 가보자고 했지만 항공사 사무실에서도 해결이 될 거라며 이곳으로 왔는데 아무런 답도 얻지 못했다. 도로 옆에 심어져 있는 꽃만 그저 활짝 피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있어봐야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으니 일단 내일 밤 11시 55분에 예정되어 있던 원래 비행기 출발 시간에 맞춰 공항에 가서 다시 부딪쳐 보자'고 마음을 다잡고 오후 일정이라도 소화하기로 일행들과 새롭게 마음을 먹었다.



우울하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시내 투어(맛있는 거 먹자~)

우선 호텔로 돌아와 일행 전체에게 소식을 전하고 내일 밤 공항에서 다시 부딪쳐보자고 얘기를 했다. 하다하다 안되면 인천으로 가는 직항편도 있으니 그 비행기를 새롭게 예약해서 가면 된다며 남은 시간동안 에티오피아를 즐겨보자고 했다. 마음 한 편으로 불안하고 우울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남은 하루 반의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행들도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으쌰으쌰 힘을 내보자고 했다.

이럴 때는 맛있는 걸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는 얘기가 툭 튀어 나왔다. 그리곤 검색을 통해 한국 식당을 찾아냈다. "그래, 한식 먹으면서 기분 풀자~!" 순식간에 일행들의 동의가 이어졌고 한국 식당을 찾아 나섰다. 숙소에서 충분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여서 걷기로 했다.

아디스아바바의 공항대로. 차들이 생각보다 아주 많다.

호텔을 빠져나와 한국 식당으로 향했다. 공항에서부터 이어진 대로를 따라 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작은 도로로 조금 더 걸어가면 나타난다. 한국어로, 한자로, 영어로 여러 언어로 한국 식당임을 알리는 간판이 나타났다. 그리고 간판 아래쪽에는 익숙한 요리들이 사진으로 박제되어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해외 여행을 가면 주로 현지 음식을 도전하는 것을 즐겨 한식을 거의 찾지 않는다. 그런데 이날만큼은 정말정말 반가웠다. 먹는 즐거움을 통해 충분히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음을 음식을 먹기도 전에 깨달았다.

한국식당의 입구. 반가운 한글과 반가운 요리 사진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현지 직원들이 메뉴판을 들고 왔다. 익숙한 한글이 빼곡히 적힌 메뉴판이었다. 우리는 된장찌개, 부대찌개, 제육볶음, 비빔밥, 칼국수 등 여러 한식들을 마음껏 시켰다. 오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익숙한 비주얼만큼이나 한국에서 먹던 그 익숙한 맛이 우리의 입 속과 마음 속을 즐겁게 해 주었다. 고국으로 돌아갈 기약이 확실하지 않은 곳에서 고국의 맛에 감탄하며 그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아이러니~! 속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에티오피아에 있는 한국 식당이지만 한국에 있는 웬만한 식당만큼 한국 맛을 제대로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국에 대한 강한 끌림 탓이었는지 한식은 참 맛있게 느껴졌다.

슬슬 배고픔과 서러움이 맛있는 음식으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을 때쯤 사장님이 나타났다. 한국인이었다. 말투와 생김새만으로도 이 먼 에티오피아에서 온갖 어려움에 맞서 싸우며 거세게, 거칠고 고단하게 살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사장님에게 심정적으로 의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알려준 여러 이야기들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안전에 각별히 조심하라는 말을 여러 에피소드와 사례를 통해 엄중하게 알려주었다. 아침부터 일이 꼬였기 때문일까? 사장님의 당부는 우리에게 너무나 진하게 각인이 되었고 어쩌면 과도한 공포심까지 마음에 품게 되었다.

점심을 다 마치고 나오는데 사장님은 마당까지 나와 우리를 숙소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너무 고마운 일이지만 올 때도 아무 문제 없이 걸어왔으니 괜찮다며 사양했다. 그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동네를 구경하기로 했다. 걷다 보니 공항대로(?) 주변으로는 꽤 큰 건물들이 많다는 사실이 뒤늦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식당으로 갈 때는 마음도 불안하고 초행길이고 해서 그랬는지 잘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 중 꽤 크고 멋드러진 건물 저층부에 여러 상가들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대형 슈퍼마켓이 눈에 들어 왔다. 커피의 나라 에티오피아의 커피, 그중에서도 사전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모예 커피(Moyee Coffee)가 혹시 있나 살펴 보고, 이런저런 먹을거리 장도 볼 겸 들어가 보기로 했다.

주상복합 건물인지 저층부터 상가가 많았다(왼쪽). 꼭 사오리라 마음먹었던 모예 커피(오른쪽).

일행들은 너나 없이 대도로 옆으로 난 내리막의 작은 길로 들어섰다. 슈퍼마켓의 입구는 그곳에 있었다. 대도로에서 보면 지하층이고 입구에서 보면 1층인 구조이다. 그런데 슈퍼 맞은 편에 있던 꽤 젊은 청년들이 우리를 보며 이런저런 말을 계속 걸어왔다. 오토바이에 기대 서서 담배를 피며 저희들끼리 낄낄 대며 웃던 녀석들이 우리를 보자 괜히 친한 척 말을 걸어 오는 것이었다.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은~! 그냥 무시하고 들어갔다. 소매치기를 조심하면서~

슈퍼마켓의 규모는 우리나라 도시의 주택가에 있는 큰 규모의 슈퍼마켓 정도 했다. 각종 먹을거리는 물론 생활용품 등 웬만한 것들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커피 코너를 찾았다. 역시~!! 커피 코너는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판매대의 한 쪽 라인이 모두 커피였다. 당연히 모두 원두 커피였고 커피 원두의 종류는 물론 원두 갈기의 정도도 달리 해서 판매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모예 커피를 찾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오히려 그 유명하다는 토모카 커피가 눈에 띄게 전시되어 있고 양도 많았다. 모예 커피는 한 쪽 구석에 양도 조금밖에 없었다.

슈퍼마켓 판매대에 전시된 많은 종류의 커피. 왼쪽 사진 중앙에 별도 매대에 있는 것이 토모카 커피이다.

하는 수 없이 있는 것이라도 사야 했다. 우리 일행이 열 명이다 보니 슈퍼마켓이 있는 모예 커피를 모두 싹쓸이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래도 양이 모자랐다. 에티오피아를 다녀왔다고 하면 귀국 후에 현지에서 산 괜찮은 커피 원두 만한 선물이 어디 있을까? 고국(ㅋㅋ)에 있는 이 사람 저 사람 떠올리다 보니 사려고 하는 양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것은 내일 모예 커피 로스팅 공장을 갈 예정이니까 거기서 더 사면 되겠다 싶어 부족한 대로 만족하기로 했다. 모예 커피 500g 한 봉지는 우리 돈으로 약 5,000원 정도면 구입할 수 있다. (같은 커피가 공항 면세점에서는 거의 3만원까지 가격이 올라간다. 면세점에서 정말 많이 놀랐었다!)

커피 말고도 밤에 함께 마실 맥주와 안주, 그리고 주전부리할 것 등을 슈퍼에서 구입했다. 아무래도 대도시다 보니 카드 결제가 되었고 스스럼없이 이것저것 살 수 있었다. 먼저 물건을 사고 입구로 되돌아 나온 우리에게 아까 그 청년들이 다시 뭐라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청년들의 숫자는 들어오기 전보다 약간 늘었고 여전히 오토바이와 난간 등에 기대서 담배를 피우며 상당히 불량한 모습으로 친절한 척 말을 걸었다. 간단히만 응답해주고 쌩하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일행이 모두 나오자 열 명이 똘똘 뭉쳐(?) 그들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 카페의 커피 맛은?

그렇게 걷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꽤 많아 보이는 카페를 하나 발견했다. 밥을 맛나게 먹었으니 에티오피아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하자며 그곳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꼬인 일정은 이제 잘 모르겠고 오늘은 그냥 동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맛난 것 먹으면서 기분을 풀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Kaldi's Coffee의 모습. 출입문 밖에는 경호원이 일일이 출입을 검사했다.

카페 이름은 Kaldi's Coffee. 꽤 괜찮아 보이는 건물의 1층에 자리잡아 밖에서 보기에도 손님들이 많아 보였다. 그런데 입구에 무장을 한 경호원(경찰인가...?)이 출입문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제지하고 간단한 검색을 했다. 커피 한 잔 마시러 들어가는데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다. 치안이 별로 좋지 않아 조심해야 한다던 한국식당 사장님 말씀이 휙 스치고 지나갔다. 하여튼 오히려 우리는 통과를 했으니 문 밖에서 저런 경호를 받으며 여유롭고 안전하게 커피를 마실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무엇을 주문해야 하나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에티오피아는 커피의 본 고장이 아닌가? 무엇을 주문해도 맛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사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이날 토모카 카페(Tomoca Cafe)를 갈 예정이었다. 커피의 나라 에티오피아를 찾은 관광객들이 꽤나 많이 들러 커피를 마신다는 그곳. 그러나 우리는 이미 코로나19의 여파로 토모카 카페를 포기했다. 대신 이곳에서 그 토모카에서 많이 시켜본다는 메뉴를 주문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카라멜 마키아토와 미니 케익, 아이스크림 등을 주문했다.

20200206_163556.jpg
20200206_165002.jpg
여러 맛이 골고루 풍부하게 들어 있는 에티오피아의 카라멜 마키아토(왼쪽), 저렴하게 즐긴 카페의 영수증(오른쪽)

카라멜 마키아토는 우리 돈으로 한 잔에 800원 정도 했다. 꽤나 좋은 시설의 카페에서(심지어 경호까지 받아가면서) 일행 모두가 우아하게 커피와 디저트를 즐기는 데 든 비용이 12,000원이 되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호텔에서 환전하느라 조금은 바가지를 썼지만(한국식당 사장님이 그랬다.) 그렇더라도 너무나 저렴한 가격에 맛난 커피를 마셨다. 에티오피아의 카라멜 마키아토는 한 마디로 모든 맛이 가득가득하다고 할 수 있겠다. 에티오피아 커피 특유의 산미와 과일향, 카라멜의 달달함이 한 가득 입 안을 채웠다. 찐한 커피에 찐한 카라멜이 더해지면서 그 맛이 풍성하게 올라왔다. 처음 입술에 닿아 마시기 시작할 때는 달콤함의 끝판으로 시작한 맛이 안쪽에 있던 커피가 넘어오면서 그 풍성한 맛이 완성된다고 할까. 비록 토모카 카페에서 마시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곳의 커피 못지 않은 좋은 커피였다고 생각한다.


아... 오늘은 정말 왜 이러지?? 휴대폰 소매치기 당하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생긴 갑작스런 비행편 변경 탓에 원래 계획했던 일정은 모두 취소했고 호텔 근처에서 아디스아바바 동네 구경하며 맛있는 거 먹으며 기분 전환을 한 우리는 오후 5시 반쯤 호텔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낮에 나갈 때와는 다른 호텔의 풍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출입구에 있는 금속 탐지 시설을 포함한 검문 시설은 어제부터 있기는 했지만(어제 체크인하러 처음 왔을 때부터 짐을 모두 X레이 검색대에 올려 통과시켜야 했다.), 이때부터는 마치 공항처럼 짐은 물론이고 사람까지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검색을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경비가 더 삼엄해진 것이었다. 게다가 오늘 밤에 같이 마시려고 샀던 맥주는 아예 통과도 되지 않았다. 그럼 이걸 어쩌냐고 그랬더니 건물 안으로 반입하면 안되고 밖에서는 먹을 수 있으니 자기네들에게 맡겨놓으란다. 아무리 치안이 불안하다고 호텔을 들어가는데 속이 뻔히 보이는 맥주까지 반입을 금지하는 것은 조금 심하다 싶었다.(알고 보니 이유가 있기는 했다. 이 다음날 그 의문이 풀렸다.)

호텔 입구에 설치된 X레이 검색대. 입구 통과하자마자 일일이 보안 검색을 했다.


그렇게 일단 통과를 하고 저녁 식사까지는 각자 방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날이라 몸보다 마음이 더 피곤했던 날이었다. 7시쯤 되어 숙소 근처에 있는 큰 식당을 알아보고 저녁을 해결하러 가기로 했다. Ethiopian Cultural Ambassador라는 이름을 가진 곳으로 에티오피아의 전통 공연을 즐기면서 이곳의 전통 음식까지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마침 호텔에서 거리도 멀지 않아 약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될 곳에 있었다.

시간이 되자 일행들은 간단한 복장으로 식당을 향해 나섰다. 걸어가는 길은 거리의 가로등이 밝은 편이 아니었고 적당한 사람들의 무리가 있어 많이 혼잡하지도 않았다. 다소 어두운 거리라 열 명의 일행들은 두서넛씩 무리를 지어 담소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호텔의 담벼락을 따라 걷다가 공항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횡단보도를 건너 다시 작은 길로 접어들었다. 대로를 지나다보니 또 몇몇 현지의 청년들이 맨 뒤쪽에서 걷던 우리 일행 몇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여러번 들었던 뻔한 말, "너네 중국인이야?"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친절한 척 대화를 시작했다. "아니다. 우리는 South Korea에서 왔다."며 대충 귀찮은 듯 대답을 하고 지나치려는데 자꾸 녀석들이 치근덕댔다. 녀석들을 뿌리치고 한 1분쯤 더 걸었을 때였다.

"엇, 잠깐만!" 반전님이 멈칫 했다. "왜요?"라는 우리의 질문에 대답은 잊은 채 온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 휴대폰이 없어." 순간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휴대폰을 갖고 나온 것 같은데 없네..." 반전님은 옷의 모든 주머니를 탈탈 털어가며 찾았지만 휴대폰은 나오지 않았다. 앞서 걷던 일행들을 붙잡아 세우고 찬찬히 찾아보아도 없었다. "혹시 호텔에 두고 왔을 수도 있어."라는 반전님의 말에 다시 호텔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그 와중에도 반전님은 나머지 일행들은 먼저 식당에 가 있으라고 하고 맨 마지막으로 걷던 우리 셋만 함께 호텔로 돌아갔다. 반전님은 방으로 들어가 휴대폰을 찾았지만 역시나 없었다. 혹시 식당으로 출발하기 전에 로비에 모여 앉아 있었는데 거기에 떨어졌나 하고 찾아봐도 없었고 호텔 직원에게 물어보아도 습득물로 들어온 휴대폰은 없다고 했다. 반전님은 다시 식당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가 갔던 길을 천천히 걸으며 길바닥을 자세히 살폈지만 끝내 휴대폰은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우려했던 그 소매치기를 당한 듯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대로를 지나 작은 길로 접어들 때 만났던 청년들이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다. 추정컨대 녀석들이 친한 척 다가와 말을 걸며 정신을 빼놓은 상태에서 다른 녀석이 반전님의 휴대폰을 소매치기해 간 것으로 보인다. 반전님은 자신 때문에 여행 분위기를 망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밤이 되었으니 소매치기에 대한 일처리는 내일 아침으로 미루고 일단 오늘 저녁은 원래 계획대로 식당에서 보내자고 고집(?)을 부리셨다. 그래서 일단 하는 수 없이 식당으로 향했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외국에서 이런 일을 당하면 참으로 해결하기가 어려워서 마음들이 많이 무거웠다.


빠른 비트와 무거운 마음

식당에 도착해보니 이미 가게 안은 흥겨운 분위기로 가득했다. 좌석마다 사람이 꽉 차서 직원들이 다니기가 불편할 정도로 빽빽했고 무대에서는 전통 공연이 이미 시작되었다. 백여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 속에서 먼저 도착한 우리 일행을 찾아야 하는데 직원의 도움으로 쉽게 찾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동양인은 우리 일행 외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일행들에게 소매치기를 당한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무거운 마음으로 표정들이 굳어졌고 사건 처리를 우선 해야하지 않겠냐고 반전님에게 얘기를 했지만 반전님의 의지는 견고했다. 그러지 말라는 것이었다. 알아서 잘 처리할테니 걱정말고 저녁을 즐기라는 것이었다. 다른 이에게 조금의 불편도 끼치고 싶어하지 않는 고운 마음을 가진 분이라 그 마음도 이해는 되지만 참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IMG_3637.JPG
Ethiopian Cultural Ambassador의 입구(왼쪽)과 내부(오른쪽)의 모습

엄청나게 빠른 템포의 음악 소리에 거의 소리를 지르는 듯한 대화가 듬성듬성 이어지던 그 타이밍에 먼저 온 일행들이 주문해 둔 음식이 나왔다. 맥주, 음료 등과 함께 인제라(Injera)라는 음식이 나왔다. 이것은 넓은 쟁반에 슈퍼 곡물이라고 불리는 고대 곡물, 테프(Teff)의 가루를 따뜻한 물에 반죽해서 2, 3일 정도 실온에서 발효한 뒤 얇게 부쳐낸 것(우리 것으로 비유하자면 아무 토핑도 없이 메밀로만 부쳐낸 전처럼 생겼다)을 깔고 그 위에 말아놓은 테프 전과 ‘와트(wat)’라 통칭해 부르는 매콤한 에티오피아식 카레 소스, 구운 고기인 ‘팁스(tibs)’가 함께 나오는 음식이다. 손으로 인제라를 뜯어 그것으로 와트를 뜨고 팁쓰를 싸서 쌈처럼 먹는 방식이다.(그래서 맨처음에 직원들이 물 주전자를 들고와서 손을 씻게 해준다) 마지막에는 접시처럼 맨 아래 깔려, 각종 소스에 폭 적셔 있던 테프 전까지 다 먹는다. 그래서 인제라를 먹을 때는 그 어떤 식기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음식이 곧 식기이기 때문이다. 맛은 발효를 한 것이기 때문에 신맛이 꽤 강하게 난다. 그리고 식감은 발효를 통해 부풀어서 푹신한 느낌이다. 와트와 팁스는 괜찮았는데 아무래도 내 개인적인 입맛에는 인제라의 신맛이 좀 강한 느낌이었다. 기분이 살짝 우울해서 그랬는지 맛도 그닥 훌륭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에티오피아 전통 음식인 인제라(Injera)

무대에서 펼쳐지는 전통 공연은 텐션을 엄청나게 끌어올릴 수 있는 음악과 춤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척 빠른 리듬에 맞춰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빠른 춤동작이 이어졌다. 전통 타악기와 함께 최신 전자악기가 함께 어우러진 음악에 맞춰 춤과 연기가 스토리 파트별로 이어졌다. 현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내용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도 현지인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전통의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는 것 같았다. 충분히 흥이 오를 만큼 경쾌한 음악과 춤과 연기가 이어졌지만 우리 일행들은 맘껏 즐기지를 못했다. 이유야 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전통복장을 한 공연단이 정말 빠른 비트에 맞춰 춤을 추었다.

특히 공연의 마지막에는 주변에 있던 관객들을 무대로 초대하여 함께 춤을 추며 분위기를 최고조로 만들어가는 연출을 보여줬다. 그동안 여행을 함께 다니면서 이런 흥겨운 무대가 있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대로 난입(?)하여 시원하게 함께 춤사위를 보여주며 공연의 분위기를 올렸던 분이 바로 반전님이다. 그런데 이날은 도저히 반전님도 그럴 만한 흥이 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휴대폰 소매치기 사건은 반전님의 흥겨움을 남김없이 모두 가져가 버린 셈이었다.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반전님은 무대에 올라가 공연팀과 함께 즐기며 관객들의 아낌없는 박수를 받고 내려왔을텐데...

무거운 마음에 빠른 비트가 야속하기만 했다.

공연의 마지막에는 관객들과 함께 흥겹게 즐기는 모습이 연출된다.(영상)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차분하게 마치며...

공연과 함께 식사까지 다 마치고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아까 그 녀석들이 혹시 나타나면 멱살이라도 잡아 끌고 경찰서로 가고 싶었는데 역시 녀석들은 자취를 아예 감추어 버렸다. 소매치기를 당한 터라 호텔로 걸어가는 길에 다들 소지품을 잘 챙기라며 서로 신신당부했다. 그러던 중에 열혈님과 유쾌님이 자신들의 소지품을 담은 가방을 점포 속으로 집어 넣더니 배불뚝이 모양을 하는 것이었다. 다들 웃음이 터졌다. 마음들이 다들 무거웠을텐데, 특히 유쾌님은 반전님 휴대폰 소매치기 건으로 머릿속이 아주 복잡했을텐데도 먼저 나서서 이런 웃음 포인트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작은 가방을 들고 갔던 나머지들도 똑같이 배불뚝이를 만들어 호텔까지 웃으며 걸어왔다. 이걸 또 기념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며 사진까지 찍었다. 배 속에 가방을 넣고 한껏 배를 내밀어 사진을 찍어 놓으니 우스꽝스럽긴 했다. 되돌아보니 참 웃픈 상황, 웃픈 사진이었다.

이들의 배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되돌아보면 정말 웃픈 사진이다.


다시 돌아온 호텔은 에티오피아 최고의 호텔다운 모습을 여전히 뽐내고 있었다. 호텔 앞 정원은 분수를 시원하게 뿜어내며 형형색색의 조명을 바꿔가며 계속해서 새로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반해 경비는 어찌된 일인지 점점 더 심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Ethiopian Skylight Hotel의 야경

숙소로 복귀한 우리는 간단한 정비를 마치고 로비에 모이기로 했다. 이 호텔 로비에는 에티오피아 전통 커피를 맛볼 수 있다. 물론 시내의 일반 카페나 가게에서 마시는 것보다 비용을 더 지불해야 하지만 안전하고 깨끗한 분위기에서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커피를 맛보기 위해 다들 모이기로 한 것이다. 커피의 원조인 에티오피아 전통 커피는 이제 에티오피아 현지에서도 쉽게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싱싱한 커피콩을 숯불에 로스팅하고 향을 피워 커피를 내리는 고단한 과정을 3번이나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커피는 번화가에 있는 카페에서는 맛을 볼 수가 없다.

IMG_3696.JPG
IMG_3701.JPG
전통 방식대로 숯불을 이용해 커피를 제조하는 직원들의 모습

숯불에 로스팅하고 커피를 내리다 보면 연기가 하염없이 피어난다. 10인분의 커피를 만들다보니 호텔 로비가 뿌옇게 될 정도로 연기가 많이 생겼다. 초현대식의 좋은 호텔 로비가 숯불 향과 연기로 가득차다니 무언가 안 어울리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에티오피아이기에 가능한 조화가 아닐까 싶었다. 커피가 다 만들어지면 작은 화로에 연기와 향이 피어나는 숯불을 담아 커피와 함게 테이블에 올려 준다. 다른 쪽에는 커피와 같이 먹을 수 있는 팝콘도 함께 나왔다. 전통 커피의 맛은 진하고 텁텁했다. 커피를 직접 끓인 게 아닐까 싶었다. 진한 커피 향과 함께 입 안에는 커피 가루가 남은 듯한 텁텁함이 있었다. 하지만 커피의 맛 만큼은 꽤 괜찮았다. 일행들은 숯불 향과 커피 향이 가득한 로비에서 맛난 커피와 함께 차분히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에티오피아 전통 커피의 모습

그리고 조촐하게 기념식(?)도 진행했다. 사실 2020년이 되면서 반전님이 직장에서 퇴직을 하셨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인연이 있어 축하도 해드리고 앞으로의 새로운 인생도 기원해 드리고 싶었다. 조금 더 멋드러진, 그리고 좀 신나는 축하를 해드리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사실 중간에 저녁 먹기 전에 근처 슈퍼와 가게를 뒤지며 파티 물품이라도 좀 사오려고 했는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케익 하나조차 구할 수가 없었다ㅠㅠ. 하는 수 없이 그저 말로만, 같이 모여서 커피 한 잔 하면서 차분하게 그간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축하와 응원의 말씀을 드릴 수밖에...

우리 일행 전부가 한 사진에 담겼다. 반전님의 새로운 인생을 응원합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하루를 어찌어찌 잘 마치고 다들 자신들의 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호텔 로비 입구에 맡겨두었던 맥주!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 기어이 직진님과 선비님, 열혈님 그리고 나는 검색대에 맡겼던 맥주를 찾아들고 호텔 앞 정원에 있는 분수대로 갔다. 그리곤 불 꺼진 분수대 옆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남은 맥주를 마시며 에티오피아에서의 마지막 밤(?)을 붙잡았다.

마지막 시간까지 붙잡고 놓지 않는 불굴의 3인방

코로나19가 번지기 시작하던 초기라 무한한 공포가 전세계를 엄습하고 중국과 홍콩 등에 대한 거부감이 심해지기 시작할 때... 그리고 우리의 여행이 한창인 중에 한국에서도 첫 환자가 발생하던 그때... 우리들은 아프리카에 있었다. 여행 중이었다. 코로나19의 심각성을 잘 모르고 있었다. 정확히는 바이러스 자체가 갖고 있는 심각성보다는 막연한 공포 때문에 허둥대던 그 후폭풍의 심각성을 잘 몰랐다. 항공편 일정이 제멋대로 취소되고 바뀌는 것은 물론이고, 가는 곳마다 중국인이냐고 경계하며 묻는 이유를 그때는 정확히 잘 몰랐다. 그저 어렴풋했을 뿐. 돌아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가 아니라 열 명의 힘은 대단했다. 혼자였으면 감당하기 힘들었을 일들이 벌어진 이날 우리는 믿음직한 다수의 힘으로 이 상황을 견뎌내려 했다. 무언가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믿음직한 일행들이 함께 있어 잘 견뎌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코로나19로 항공편이 취소되어 귀국길이 막막해도, 그 바람에 여행일정이 다 꼬이고 취소되어도, 아프리카 한 복판에서 소매치기를 만나 새 휴대폰을 잃어버려도, 그래도 우리는 마지막 분수대 앞 맥주 파티에서까지도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날도 만만치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ㅠㅠ




keyword
이전 17화[아프리카#17] 국경을 넘고 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