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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 Sep 01. 2024

위기의 골드코스트

Day. 5

2024년 8월 8일 목요일


홍박사✐


아침에 일어나 창을 보니 날씨가 우중충했다. 어둑한 바깥 풍경을 보고 있자니 그간의 여독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지난날의 여행을 통해 그 퀄리티를 좌우하는 건 다름 아닌 날씨란 결론을 얻었다. 같은 풍경도 날씨에 따라 아름답게 보이기도, 우울해 보이기도 하니까. 김 군 역시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여 상태를 물었더니 목이 좀 부었단다. 이마에 손을 짚어보니 다행히 열감은 없었다. 호주의 겨울 날씨가 봄가을 같다지만 극심한 기온 변화로 몸이 축난 모양이었다. 게다가 둘 다 한동안 금주를 하고 있었는데 이곳에 와서 들이킨 와인 몇 잔 때문에 피곤이 가중된 것 같았다. 쉬엄쉬엄했어도 여행은 체력을 요하는 법. 단, 홍이은만 오늘도 하이 텐션이었다.


오늘은 비치몬트에서의 사흘 일정을 마치고 골드코스트로 이동하는 날이다. 출발 전에 잉그리드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셀카 모드 화면에 비친 넷은 방금 막 일어난 아침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본의 아니게 신세를 진 죄송함과 헤어짐을 앞둔 아쉬움 때문인지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단체 사진 촬영 후 제임스의 25만 킬로를 뛴 테라칸을 타고 새로운 숙소로 향했다. 여기저기가 온전하지 않은 오래된 차였지만 더없이 포근하게 느꼈다. (묻지 않았는데도 현대차 좋다고 연신 칭찬을 하셨다) 골드코스트 도착 후 제임스와 악수를 나누며 서로 앞날의 안녕을 빌었다. 축축한 날씨 아래 그의 커다란 손을 맞잡으니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되었다.


숙소 방명록에 남긴 이은의 글과 그림


골드코스트. 금빛 해변이라니. 해안 도시에 붙여줄 수 있는 가장 화려한 이름이다. 떠나오기 전, 이곳의 계절이 겨울임은 알고 있었지만 이름 때문인지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금빛 해변의 낭만이 떠올랐었다. 막상 도착하고 보니 기대했던 바와 조금 어긋났다. 흐린 날씨에 비까지 내린 탓인지 어느 소설 속 쇠락한 관광도시처럼 느껴졌다.(실제로는 날씨가 맑아지자 정말 아름다운 곳으로 변했다)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짐을 맡겨두고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트램을 타고 골드코스트의 중심 번화가인 카빌 애비뉴로 이동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카레를 먹기로 했다. 고심하지 않고 트램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찾았다. 인도 현지 스타일의 식당이었는데 괜찮은 평점에도 불구하고 입에 썩 맞진 않았다. 빠른 비트의 힙합음악을 쉴 새 없이 틀어 놓은 데다 새의 나라답게(?) 비둘기가 수시로 들어와 남은 음식을 먹어대는 통에 신경이 곤두섰다. 급하게 식사를 마친 후 김 군을 위한 약과 몇 가지 식료품을 사들고 숙소로 걸었다.


골드코스트의 날 좋은 날 (첫 날은 흐리고 비가 왔다)


아이도 이제는 조금 지쳤는지 아무리 재촉해도 걸음을 맞추지 않고 뒤쳐지며 힘들다고 작은 투정을 부렸다. 숙소에 가서 다 같이 쉬었으면 하는 바람에 마음이 조금 급해졌는데 이동이 지체되자 순간 그간 쌓였던 피로와 감정이 뒤섞인 체로 튀어나와 결국 아이에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휴… 이런 순간에 정말 안타까운 건 화를 낼 일이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를 내는 즉시 후회가 되기 마련이다.


언젠가 아이를 귀한 손님처럼 대하란 조언을 들었다. 어리다고, 자식이라고 함부로 하지 않고 존중과 배려의 마음으로 아이를 소중히 여기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그간 아이를 키우며 육아에 대한 조언과 잠언을 수없이 보고 들었고, 매번 고개를 끄덕이며 실천의 의지를 다졌지만 순간순간 부족하고 모자란 부모란 사람으로서의 나를 마주하게 된다. 이럴 땐 선택지가 없다. 다시 시작할 수밖에. 사과를 건네고 손을 내미는 것이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처치다. 아이에게 다가가 사과를 했다. 다만 언젠가 아이의 머리가 더 굵어지면 이런 처치도 말을 듣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래서 그 골이 점점 커지고 깊어지면. 상상조차 하기 싫다. 부단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나의 책임이니까.


숙소에 오자마자 이은은 함께 수영을 가자고 했다. 고맙게도 아이는 매번 생각보다 금세 잊고 대수롭지 않게 쿨한 마음을 보여준다. 몸집이 작다고 마음까지 작지 않다. 못 이긴 체 아이와 손을 꼭 잡고 풀장으로 향했다. 역시나 한두 시간 신나게 놀다 보니 오늘의 피로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 사이 낮잠을 잔 김 군도 많이 회복된 듯 보였다. 딱 그때, 두꺼운 구름이 걷히고 해가 보이기 시작했다. 뭐지, 이 통속적인 성장영화의 마지막 전개 같은 풍경은. 그렇다면 나 또한 클리셰를 빌려 우리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얘기로 오늘의 기록을 마무리해보련다.


어푸어푸 신나는 수영






김 군✐


새벽녘부터 목이 아팠다. 감기의 전조 증상인 듯했다. 모든 신경이 목구멍에 집중되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어느덧 날이 밝아 비치몬트를 떠나야 하는 시간이 되었고, 마지막까지 친절한 제임스의 차를 타고 브로드 비치까지 왔다. 이제부터는 다시 우리의 힘으로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오늘따라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찬 기운에 뼛속까지 시렸고, 잠을 못 잔 탓에 현기증이 났다.


새로 옮길 리조트에 일단 짐을 맡기고 근처를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충전해 둔 Go Card(교통카드)는 또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아 어쩔 수 없이 또 한 장을 발급받아야 했다. 아점을 해결하기 위해 들른 인도식 카레집에서도 밥이 넘어가지 않을뿐더러 목소리를 내는 것마저 쉽지 않았다. 마트에 들러 허기를 달랠 식재료를 고를 때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계산을 마치고 나니 짐이 꽤 되어 내 가방에도 일부를 나눠 담아야 했는데, 금방이라도 뒤로 발라당 넘어질 것 같았다. 벽돌로 가득 찬 것 같은 가방을 메고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걷기 힘들다며 징징대는 아홉 살을 데리고 이 이역만리 타지에서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멍하게 걷고 있는데 내 표정을 읽었는지 홍박사가 내 가방을 재빠르게 휙 채갔다. 어깨 한가득 짐을 짊어지고 앞서 걷는 그의 뒷모습에서 가장의 무게가 느껴졌다. 흡사 병자의 몰골을 한 와이프와 온몸이 쑤신다고 호소하는 아홉 살. 그 둘을 어르고 달래며 남반구 이름 모를 거리를 헤매는 저 중년 남성이 가여웠다.


골드코스트의 트램 역 (Sufers Paradise North)


체크인 시간이 되어 숙소 문을 열고 들어와 창 가득 들어오는 오션뷰를 처음 마주하고도 우리 셋의 기운은 냉랭했다. 여행 5일 차, 다들 많이 지쳤으리라. 잠시 침묵의 휴식 후 운동으로 충전하는 스타일인 홍박사는 이은이를 데리고 리조트 안의 수영장으로 향했고, 수면으로 충전하는 스타일인 나는 꿀처럼 달디 단 낮잠을 잤다. 각자의 방법으로 충전을 하고 나니 늦은 오후쯤엔 다시금 셋 다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았다. 다행이었다.


충전과 회복을 위한 마지막 필살기로 이름부터 친근하기 그지없는 한인 마켓, ‘하나로 마트’를 찾았다. 하나로 마트는 과연 아시안 마켓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국 마트를 통째로 옮겨놓은 듯 진열장 가득 익숙한 물건들이 가득했고 그 사이를 오가며 신중히 오늘 저녁 식사를 위한 품목들을 스캔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묵은지, 돼지고기, 깐 마늘, 상추, 쌈장, 햇반을 비장하게 골라 담았다. 오늘 저녁은 바로바로… 돼지고기 김치찌개닷..! 맛을 상상하면서 카트에 김치를 담는 것만으로도 벌써 몸이 낫는 것 같았다. 숙소에 오자마자 홍박사와 나는 일사천리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햇반을 데우고, 상추와 마늘을 씻고, 묵은지와 돼지고기는 한꺼번에 부어 팔팔 끓였다.


캬아! 이거지예!


초스피드로 차린 저녁상 앞에 앉아 갓 끓여낸 김치찌개를 허겁지겁 한 술 떴다. 입에 착 달라붙는 시큼 얼큰한 국물이 아팠던 목구멍을 사악- 지져주면서 흘러 넘어가, 단전까지 뜨끈-하게 데워주었다. 뭉텅뭉텅 썰어 넣은 돼지고기는 국물을 한껏 머금어 씹을 때마다 감칠맛의 향연을 펼쳤다. 근 3년 간 먹었던 김치찌개 중에서 이렇게 기가 막혔던 김치찌개가 있었던가. 한 입 먹을 때마다 ‘크아’, ‘흐어’ 내지는 ‘캬아’하는 알 수 없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햇반 하나를 싹싹 비우고도 아쉬워 테이블을 좀처럼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저녁을 해치우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컨디션이 많이 회복되었다. 김치찌개와 쌀밥 만으로 에너지 바가 빨간색으로 끝까지 차오른 느낌이 들다니, 과연 ‘밥이 보약’이고 나는 어쩔 수 없는 '코리안'이다. 아플 땐 오늘이 그저 빨리 지나갔으면 싶었는데, 몸이 나으니 비로소 내일에 대한 기대도 생긴다. 오늘부터 우리가 머무는 해변의 이름은 무려 Surfer’s Paradise. 얼마나 황홀한 곳이기에 이런 궁극의 이름이 붙여진 걸까! 내일은 좀 더 딴딴해진 심신으로 해가 눈부시게 빛나는 Paradise를 200% 만끽할 수 있기를. 그러니 모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늦저녁의 노스 파라다이스 비치





이은✐

오늘은 늦게 일어났다. 오늘은 호주에서 먹었던 것을 알려 주겠다. 그럼 바로 GO!!   


1. 치킨 카레

2. 머스타드와 스테이크

3. 바비큐 (소시지, 고기, 양파, 감자)

4. 크림볶음밥

5. 돼지고기 김치찌개

6. 웡카 킨더조이

7. Gumiyum

8. 뽀글이

9. Tomyang Cup Noodle

10. 치킨버거&감자튀김

11. 햄치즈 샌드위치


G'day = Good day (호주 사람들의 흔한 인사말)



⛳︎ 오늘의 일
비치몬트 → 골드코스트 → 커리 익스프레스 → 카빌 애비뉴 → 수영장 (숙소 내) → 하나로 마트 → 숙


◇ 골드코스트 (Goldcoast)
브리즈번으로부터 약 70km 거리에 위치한 해안 도시. 1년 내내 수영과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끊이 지 않는다. 끝없이 펼쳐진 해안을 따라 숙박시설, 관광 명소, 쇼핑 센터 등이 들어서 있으며 트램이 잘 되어 있어 이동이 매우 편리하다. 비치 프론트 마켓, 나이트 마켓 등 소소한 이벤트부터 골드코스트 마라톤, 슈퍼카 레이싱 대회, 뮤직 페스티벌 등 즐길거리도 다양하니 여행 일정을 세울 때 참고하면 특별한 추억을 만들 수 있겠다.

◇ 카빌 애비

골드 코스트 중심의 번화가. 서퍼스 파라다이스 앞쪽의 거리를 중심으로 음식점, 편의점, 쇼핑몰 등의 편의시설이 밀집되어 있어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특히 금요일밤부터 젊은이들로 불야성을 이루며 여기저기서 열리는 길거리 공연이 주말의 설렘을 한층 더 북돋는다.

◇ 하나로 마

호주 곳곳에 위치한 한인 마트. 한국의 하나로 마트와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동명의 상호로 운영되고 있다. 들어서면 마치 동네 마트에 들어선 듯 한국의 물건들로 빼곡하여 심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한국보다는 좀 더 비싸게 판매하니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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