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달라진 아이
14/Sep/2019
저녁 즈음이 되어 파랑을 데리러 갈 때가 되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나 하루 종일 뭐 했지? 그동안 뭐 했지?’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 주부들이 가끔씩 하는 비슷한 생각일 것 같다. 잠시 멍 때리며 이것저것 한 일을 손꼽아 보다가 이렇게 정리하고 한다.
‘뭘 뭐해! 애랑 같이 있었으니 애 키운 거지!'
아이랑 함께 있어주고 생활을 함께 하는 것, 그것으로도 아주 큰 일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다독여준다. 지금 보다 가사에 대한 대우와 처우가 너무도 폄하되던 우리 어머니들, 그리고 할머니들 세대의 그분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2달 겨우 지내고 이런 이야기를 꺼내니 스스로도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아무튼 요즘 파랑의 과제 러시로 쉬지도 못하고 매일매일 오래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은데 준영이가 엄마에게 달려들어 떼쓰지도 않고 이해하며 아빠랑 매일 먼저 잠들고 지내줘서 참 고맙고 대견하다.
그런 준영이가 완전히 달라진 사건들이 있었는데...
이번 주 '음악과 친해지기’ 수업의 악기는 트롬본이었다. 꽤 커다란 관악기였고, 평소와는 다르게 각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미니어처 악기가 없이 실제 악기로 한 번씩 연주할 기회가 주어졌다. 아무래도 처음 접하는 아이들이 한 번의 연습으로 실제 트롬본으로 소리를 내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미리 준영이에게 소리 내는 연습을 열심히 하고, 기회는 한 번뿐일 것이라고 일러두었다.
1살 많은 형님들이 별 어려움 없이 소리를 내었고, (선생님도 놀랐다 @.@)
이제 준영이 차례가 되었다
여유롭게 트롬본으로 나서며 입을 대었는데 본인 생각대로 적당히 살살 불었는데 꼼짝을 하지 않으니 표정이 점점 불안하게 변했다. 결국 입에 대고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ㅡㅜ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안타까운 마음에 형님들과, 선생님, 나까지 입술로 연습한 대로 부는 모습을 보여주고 따라 해 주길 바랬다. 하지만 이미 헤매기 시작한 눈동자는 점점 당황과 울상으로 바뀌면서 주어진 시간을 모두 써버렸다.
기회가 끝나버린 아쉬움에 내게 울며 안기며 한 번 더 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다행히 선생님께서 눈치를 채고는 한번 더 하겠냐고 물어보셨다. 준영이는 바로 한번 더 하는 것보다는 선생님이 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이 말을 전하니, 선생님이 시범을 보이며 본인을 영상으로 찍으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시범이 마치고 나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다음 내용으로 넘어갔다.
아마 준영이는 이때부터 속상함이 올라와서 억울했던 것 같다.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아이들 부모들도 있는 수업이기에 남은 시간을 잘 보내고 아빠와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다행히 잘 견뎌내고 수업을 마쳤다.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선생님이 나에게 ‘준영이 나이 아이들에게는 흔한 일이니, 너무 뭐라 하지 마.'
(내 표정과 행동이 그렇게 보였나 보다 ㅡㅜ)
나와서 준영이를 안자 서러움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본인이 연습을 열심히 안 하고 실제로 연주할 때도 제대로 안 불어 본 것은 맞으나
부는 방법을 제대로 알기 전이어서 그랬다고 한다. (준영이는 아주 천천히 차근차근 눈으로 머리로 배운 뒤에 행동에 옮긴다)
그래서 기회를 한 번 더 준다고 했을 때, 선생님 시범을 보고 나서 제대로 다시 불어볼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룹수업이고 시간과 기회가 제한되어 있기에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고 그 아쉬움에 서러움이 폭발했다고 한다.
30분 넘게 우는 아이를 안고 달래며 최대한 부드럽게 이런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엄마 아빠는 준영이에게 많은 기회와 시간을 줄 수 있고 앞으로도 줄 것이지만 집 밖에서는 오늘과 같이 공평한 기회를 가질 것이기 때문에 기회가 올 때 준비가 덜 되어있어도 용기를 내서 한 번 해보자고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언어도 서툰 상황에서 처음 해보는 이런 경험은 준영이에겐 조금 힘들었던 것 같다. (선생님, 친구들, 형님들, 다른 아빠 엄마들 그리고 아빠가 모두 자기만을 바라보는 상황에서 준비 안 된 것을 하는 것이 큰 압박이었을 것이다)
외부에서 겪는 공평한 기회에 대한 소중한 첫 경험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아빠로서 그 상황에서 설명보다는 더 바로 따뜻하게 오래 안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된다. (선생님의 ‘돈 푸시 힘’이 잊히질 않는다)
이번 주면 벌써 유치원에 등원한 지 4주 차가 된다. 등 하원 할 때 내가 느끼는 달라진 점이 있는데 준영이가 나타나면 친구들이 먼저 와서 인사하고 ‘준이 왔어~’라며 반겨준다. 덩달아 아빠인 나에게도 인사를 먼저 해주는 아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한 친구는 나에게 와서 ‘내가 준영이 영어 배우도록 도와주고 있어~’라고 하는데 어찌나 고맙던지 실제로 그 친구가 준영이에게 이런저런 말을 알려주고 따라 하게끔 한다고 한다. 물론 모두 기억은 못하지만 몇몇 말들은 그 아이를 통해 배웠다고 한다. (굿모닝~ 이라든지) 그 친구에게 다음날에는 내가 직접 고맙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옆에서 준영이도 함께 고맙다고 하였다. 쑥스럽게 괜찮다고 하고 달려가는 친구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유치원에 컴퓨터로 하는 게임이 있는데 준영이 말로는 ‘여자 친구들이 잘 모르면 옆에서 내가 알려줘~’ 이 녀석이 벌써... 남자 친구들에게도 친절한 거길 바래...
그리고 준영이의 그림 솜씨가 선생님들을 놀라게 하곤 하나 보다. @.@ (이건 순전히 팔이 안으로 굽는 내 느낌 기준) 하원 할 때마다 작품을 하나씩 보여주며 놀라웠다고 이야기해주시는데 그러한 관심과 준영이의 변화에 아주 감격스럽다. 굴렁쇠에서 다진 실력이 발휘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어제 하원 할 때 원장 선생님이 내게 건넨 첫마디가 이거였다.
‘준이 완전히 달라진 아이가 되었어! 오늘 엄청나게 웃고 뛰며 흥겨운 날을 보냈거든!'
그동안 언어적인 한계로 인해 조용조용 정적으로 놀았던 준영이가 놀이에 참여해서 뛰어놀았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었다. 나중에 받은 준영이의 사진들에서 즐기고 있는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정말 감사하다.
준영이도 어려워했던 친구들 이름들도 하나둘씩 이야기하며 누가 어떻고 누가 뭐했고 등등 예전의 굴렁쇠 스타일로 지낸 이야기를 전해주기 시작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잘 지내고 잘 놀아주는 준영이의 변화가 가장 반갑다.
완전히 달라진 준영이!
사실은 이게 원래 준영이다!
기타를 사서 깔짝대고 있는지 벌써 한 달이 되어간다. 드디어 한 곡을 잡고 연습을 하게 되었다. 그냥 코드만 외우던 거랑은 다르게 재미가 생겼다.
어느 날 저녁에는 준영이의 제안으로 우리 가족 첫 합주를 하게 되었다. 내가 연습하는 곡으로 (현재 가능한 유일한 곡) 나는 기타를, 파랑은 피아노를, 준영이는 하모니카를.
그 연주가 어땠냐는 중요치 않고 이렇게 다 같이 연주를 하다니 이것도 여기 왔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여유와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즐거웠다!
이렇게 호주에서 3개월 차를 맞고 있는 우리 가족은 ‘완전히’ 달라진 생활을 하고 있었다.
* 매일 쓰는 진짜 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급 정보가 있지도 않은 아이와 지내면서 겪는 온갖 후회와 반성의 잡생각 뭉탱이 '육아 생존기'를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빠로서 기록하는 글을 쓰고 나면 자주 듣는 말이 있어요. 어떻게 아빠가 이런 육아 일기를 쓸 수 있냐고요. 부럽고 신기하다고요. 정말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혀 관심 없던 전과 달라진 건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일대기는 제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에 담겨있습니다. 변화를 원하신다면 권해봅니다. 또 누가 변할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