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다닌다 - 호주 크리스마스 라이트닝 Christmas Lights
바야흐로 크리스마스다.
추운 겨울에서 눈과 함께 했던 30년 넘는 크리스마스를 보냈더니... 눈이 없는 이곳 호주에서는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이 뜨거운 더위에 산타와 루돌프가 제대로 다닐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어색하게 어울리지 못하고 덩그러니 크리스마스 속에 던져져 있는 기분이다.
그러던 중 고급 정보를 입수했다.
바로 이 비밀 지도다.
보이는가? 흩뿌려진 수많은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이? 이 표시가 밤마다 그가 출몰한다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갔다. 이 더운 나라에 ‘산타’가 정말 존재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Christmas Lights 2020 - Aura Property Sunshine Coast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 평소보다 자는 시간을 뒤로 늦췄다. (원래는 8시에 기절함)
깜깜해진 밤이 되자 조용히 차를 몰았다. 표시가 유독 몰려있는 곳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가까워질수록 어둠은 걷히고 환한 빛이 강해졌다. 정말 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눈이 부시기 시작했다.
갑자기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정신없이 산타와 루돌프를 만나 환상의 나라에서 지내던 중 아들에게 긴급 신호가 왔다. 그 신호의 암호명은... ‘쉬야! 쉬야!’ 였는데… ㅜㅜ
깜깜한 그곳에서 화장실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남의 집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파랑의 순간적인 기지로 차에 남겨져있던 생수 페트병을 떠올렸다. 천만다행으로 비상 상황은 후련한 아들의 표정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극도로 올라갔던 긴장감이 풀려서일까? 우리 가족은 잠이 쏟아져서 수많은 빛나는 산타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바야흐로 크리스마스다.
차로 돌아가던 중 한 아저씨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메리 크리스마스~’ 역시 여긴 친절한 호주구나 생각하며 크리스마스 인사로 응답했다. 끝난 줄 알았던 대화가 이어졌다. (밤에는 잘 안 보여서 영어 실력이 줄어드는데 어쩌지...)
[아저씨] 어떤 집의 크리스마스 불빛 장식이 제일 마음에 들어?
[나] 뭐라고? (역시나 눈이 잘 안 보여서 한 번에 못 알아들음)
[아저씨] 이 중에서 어느 집이 최고라고 생각하냐고~
[나] 아… 사실은 여기 있는 집들 중에선 없어 ^^;; 저쪽 건너편 저 크고 화려한 집 보이지? 거기가 최고라고 생각해!
[아저씨] 젠장! 젠장! (댐 잇! 댐 잇!)
[나] (꾸며놓은 집주인임을 뒤늦게 깨달음) 앗! 하하하. 미안해~ 메리 크리스마스~
나와 같은 관광객인 줄 알고 너무 솔직하게 말했다. 눈치가 빨랐다면 기분 좋은 말을 해주었을 텐데... (당연히 너희집이 최고지!)
미안해요 아저씨. 밤이라서 영어도 어둡고, 센스도 어두웠어요.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허전하고 답답하다. 하얀 바탕에 검은 글자를 채우는 새벽을 좋아한다. 고요하지만 굳센 글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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