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바라보는 나라는 아빠
호주에서 어버이로 지내면서 5월을 기다렸다. 그런데 어버이날은 없고 비슷한 시기인 5월 둘째 주 일요일에 마더스 데이, 엄마의 날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아빠로서 지내보려던 나는 김이 팍 샜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파더스 데이를 준비하라는 광고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여긴 엄마, 아빠를 따로 챙기고 있었다. 아빠의 날은 매년 9월 첫 주 일요일이다. 부모의 사랑을 하루에 몰아서 감사하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각각 다른 역할을 떠올리며 기념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빠만을 위한 가족들의 선물과 인사를 받는 기분은 색달랐다.
그래서 내일은 파더스 데이다. 나를 위한 날이랄까? 하하. 아들은 몇 주 전부터 분주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무언가 사부작사부작 준비를 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내게 계속 물어보고 있다. '아빠~ 선물 미리 보여줘도 돼?' 나 같으면 당일에 짠하고 보여주며 놀라게 해주고 싶은데 아들은 만들어지는 순간 바로 주고 싶어 한다. 이게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겠다. 태어나서부터 늘 선물을 바로바로 주고 확인하고 싶어 했다.
이번 주의 마지막 하교 시간, 날 위한 아이템을 잔뜩 들고 교실 밖으로 나왔다. 얼굴에는 벌써 '히히'거리는 표정이 가득하다. 선물 공개하는 게 그렇게 좋은가 보다. 뭔가 가득했다. 빨리 풀어보라는 재촉에 하나씩 풀고 들여다보았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들과 나를 그린 멋진 작품! 내 뒤에 업힌 아들과 빨간 넥타이를 맨 내 모습이 정겹다. 내가 자주 말하는 '아들~ 꼭 붙어줘~'를 표현해 준 것 같아서 기뻤다. 다음은 정성껏 포장한 선물 상자. 자기 용돈도 합쳐서 학교에서 골라온 것들이다. 휴대용 손전등과 맥주병 쿨러(쿨 헬퍼). 아들의 고민이 묻어난다. 집에 하나밖에 없는 비상용 손전등을 가지고 놀고 싶은데 장난감이 아니고 건전지 달면 급할 때 못쓴다고 매번 가만히 두라고 했다. 그래서 이제 마음껏 가지고 놀기 위해 하나를 더 사온 게다. 다른 하나는 그나마 내가 맥주를 아주 가끔 먹기에 쿨러를 사 왔거나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사 왔을 테다. 아니면 정말 내가 영웅이라서!?
진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우리 아빠는 이래요'! 세 군데 하이라이트가 있다. '아빠는 자는 것을 좋아해요.', '아빠는 소파에서 자는 것을 잘해요.', '아빠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싫어해요.' 으악! 하하. 어쩜 그렇게 3박자가 딱인지. 맞다. 맞아. 난 언제나 눈을 감고 쉬고 있다. 틈만 나면 잔다. 가급적 야외 활동을 자제한다. 아들이 파악학 게 정확하다. 이 날은 일 년 동안 아들에게 보여준 내 모습을 확인하는 날이 되어 버렸다. 뭐 그래도 뿌듯한 게 하나 있었다. 날 그린 그림에 보면 'A'라고 온몸에 쓰여 있는데 이게 뭐 나면 '영웅'을 뜻한다. 강렬한 미디어의 힘으로 마블 캡틴 아메리카의 'A'이자 어벤저스의 'A'다. 늘 자는 것 같지만 이래 봬도 내가 늘 영웅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들을 돌보고 키우고 먹이고 노는 내가 그렇다고 한다. 이 역할이 언제까지 필요할지 조심스레 물어봤다. 대학생이 될 때까지는 필요할 것 같다고 한다. 어디 보자, 지금 1학년이니까... 음... 대충 10년은 더 필요하다는 말이구나. 앞으로 10년은 할 일 걱정은 없겠다.
1. 북 위크 셀레브레이션
올해도 어김없이 열린 축제 퍼레이드! 책에서 본 좋아하는 캐릭터로 꾸미고 학교에 가는 날이다. 아들은 아주 오래전에 마트에서 발견한 '토르' 의상을 입고 갔다. 노란 번개를 만들어서 들고. 집에 마블 어벤저스 책이 있으니 아주 반칙은 아니었다. 즐겁고 흥미로운 하루를 보내고 왔다.
2. 첫 한글 일기
요즘 한글 놀이에서 아들은 일기 쓰기를 배우고 있다. 제목 정하기, 날짜/요일, 소재 정하기, 시간 흐름, 장소, 등장인물, 생각과 느낌. 골고루 하나씩 연습해 나갔고 드디어 온전히 하루의 일기를 쓰는 순서가 되었다. 집중해서 열심히 써 내려갔다. 제목은 '계속 놀기'. 이거 하고 놀아서 좋았고 저거 하고 놀아서 좋았다는 이야기다. 마지막엔 더 계속 계속 놀고 싶다는 바람을 가득 담으며 마무리된다. 오! 요즘의 너를 제대로 담은 일기가 맞다. 놀아도 놀아도 부족하다고 하니까. 너의 첫 번째 한글 일기를 축하하고 기념한다!
3. 환경 수호자
놀이터에서 놀던 아들이 헐레벌떡 무언가를 들고 내게 달려왔다. 터져 버리고 남은 고무풍선 조각이었다. '아빠, 이거 아무 데다 막 버리면 안 돼. 바다거북이 먹으면 안 되잖아.' 허겁지겁 쓰레기통에 넣고 안심하는 아들이다. 학교에서 배운 모양이다. 한참 기특해서 쳐다보는 내게 추가 설명을 해줬다. '이게 해파리랑 비슷하게 생겨서 먹을 수 있거든. 알겠지?' 자기를 바라보는 내 멍한 표정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나 보다.
어젠 이곳에서 처음으로 혼자 병원에 다녀왔다. 어디가 아파서 간 것은 아니고 코로나 백신 1차 접종을 맞았다. 괜히 코로나 시대를 절감하며 혼자 남겨지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주사를 맞은 후 대기하는 15분 동안 더 깊이 파고들었다. 나한테 있을 부작용 걱정부터 이 세상은 어떻게 흘러가는 걸까 까지. 시간이 다 되었다며 이제 탈출 가능하다는 간호사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걱정은 안 하는 편인데 시간과 장소가 주어지니 잠시 깜빡했던 모양이다. 자고 일어난 지금 한쪽 팔이 조금 욱신 거릴 뿐이다. 다시 하루가 주어졌다. 오늘도 되고 싶은 아빠로서, 그리고 되고 싶은 나로서 살아갈 뿐이다.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허전하고 답답하다. 하얀 바탕에 검은 글자를 채우는 새벽을 좋아한다. 고요하지만 굳센 글의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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