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한 딴소리를 떨쳐 낼 용기
글을 쓸 땐 재밌다. 하고 싶은 말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맛있게 꾸미는 과정이 신난다. 여기선 궁금하게 저기선 놀라게. 이리 틀고 저리 뒤집으며 즐겁게 읽을 독자를 상상하며 머리를 쥐어짠다. 남에게 보이기 전에 스스로 시험하는 문턱이 낮아도 너무 낮아서 읽고 또 읽어도 계속 좋아한다. 히히, 하하, 깔깔대다가 이러다간 미치겠구나 싶을 즈음에 세상에 내놓는다. 그때부터 진짜가 시작된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색다른 시선과 마음으로 읽어내고 소화한다. 글 쓴 자는 말없이 침만 꼴깍 넘기면서 오물오물거리는 그의 입만 바라보며 기다린다. 다 먹고 나면 어떤 말이 나올지 너무너무 궁금해하면서.
다양하다. 무플, 선플, 악플까지 제각각이다. 먼저 말이 없으면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니 온갖 상상을 하게 된다. '맛이 별로였나? 뭘 잘못 넣었나? 조리를 덜 했나?' 답답하지만 물어볼 곳이 없으니 속만 타들어 간다. 그러다가도 한 줄기 빛을 만나면 온 세상이 천국으로 변한다. 하고 싶은 말을 완벽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의견을 듣는 순간이다. 생각에 대한 동의에 더해 글까지 좋다고 하면 절로 춤이 나온다. 맛과 모양이 모두 좋다니 차려낸 사람이 날아갈 만하다. '제 생각은 다른데요'라며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자도 있다. 예의가 있냐 없냐에 따라 선플이 되기도 하고 악플이 되기도 한다. 다른 의견은 본래의 글에 담긴 생각을 제대로 소화해야만 나올 수 있다. 매너 있게 제시하면 가르침이 된다. 생각지 못했던 부분일 수도 있고 세상엔 나와 다른 사람이 있다는 자각일 수도 있다. 다짜고짜 버릇없게 덤벼들 땐 참 경우가 없다. 거칠게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몰아치면 어떤 지혜를 가져와도 싫다. 불쾌한 반응은 '그러라 그래' 기술을 시전하며 신경을 끈다.
'흥, 칫, 뿡'으로도 걷어내지 못하는 묘한 반응도 있다. 된소리와 거센소리로 범벅이 된 욕설은 못 들은 체하면 그만인데 그런 거 없이 차분한 말투인데도 기분이 가라앉는다. '엉플, 엉뚱한 리플'이라고 칭하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글에 대한 아무 언급 없이 무작정 전하는 안부 인사는 귀여운 엉플이다. 읽었는지 아닌지 모를 단순히 친목을 표하는 반응은 쓴 사람을 축 처지게 만든다. 고작 인사나 나누려고 몇 시간을 고민해서 썼나 싶다. 이 정돈 그래도 약과다.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최고의 엉플은 '딴소리'다. 말 그대로 글을 제대로 읽지 않고 하는 말이다. 그런 내용을 썼나 싶어서 다시 글을 뒤져보게 된다. 하지도 않은 말이 어떻게 저 사람 머리에 들어갔을지 당황스럽다. 때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열심히 보는 이도 있다. 노른자에 다가가기 위해 사용한 예시나 비유에 꽂혀서 물고 늘어진다. 그거 아니라고 열을 내며 설명해도 소용없다. 보고 싶은 것에 고정된 고개는 깁스한 것처럼 조금도 돌아가지 않는다. 이러고 나면 며칠은 앓아눕는다. 똘망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엉뚱한 사람 때문에 글쓰기에 회의가 든다.
글이 모이고 모여 셀 수 없는 고민 끝에 책이 탄생한다. 출간을 관통하는 고통의 크기만큼이나 책의 후기는 차원이 다르게 다가온다. 더 크고 격렬하고 묵직하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주는 말에는 무한한 감동을 한다. 고민하며 뱉어냈던 글자가 하나씩 쓰다듬어지며 인정받는 기분이다. 세상에 나오느라 애썼다며 포근하게 안아준다. 모두 담을 순 없겠지만 조금 남겨보자면 하나하나 귀하다. '덕분에 옆 사람과 육아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서로 간의 이해를 통해 부부 사이가 좋아졌어요. 남편에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남편이 유일하게 읽으면서 공감한 육아서예요. 소개해준 지인이 읽고 나서 육아휴직을 하고 싶어졌대요. 함께해야만 하는 아빠 육아에 대한 자세를 배웠어요. 세상에 꼭 필요하며 모두 읽고 변해야 할 책이에요. 좋은 책 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 책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달라지길 바라요.' 하고 싶었던 말뿐만 아니라 기대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돌아오면 붕 떠오른다. 사회에 필요하다고 믿고 꿋꿋하게 밀고 나가 책으로 만들어 낸 여정이 보상받고 있다. 잘려 나간 나무에게 '우리 그래도 의미 있는 일을 했나 봐'라며 개운하게 던질 말을 건져낸다.
아쉽게도 무관심한 탓인지 악플은 없다. 최소한의 관심이 있어야 아니라며 핏대를 세우는 자가 나타날 텐데 아예 없다. 반박하기 어려운 이야기라서 그런지 나서 봤자 좋은 소리 듣기 어려우니 숨어있는지도 모르겠다. 무플보단 악플이 낫다더니 뭐라 해도 좋으니 누구라도 더 읽어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반대 의견에 한숨을 돌리고 있으면 황당한 엉플이 무대에 뛰어든다. 예측하기 어려운 상대방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기괴한 자세로 덤벼들며 괴롭힌다. 핵심이 아닌 것에 꽂힌 채 전체 맥락과 본질을 놓치고 훅과 어퍼컷을 마구 날린다. 공격 패턴도 다양하다. 나도 놀면서 지낼 수만 있다면 육아휴직을 몇 번이라고 하겠다며 오른팔을 뻗는다. 호주에서 지낼 수 있으니까 속 편한 말을 할 수 있는 거지라며 왼발을 내지른다. 대놓고 때리는 아픔보다 더 미운 불쌍한 척도 있다. 함께 육아할 마음은 있는데 먹고사느라 바빠서 못하는 아빠가 안쓰럽다는 말을 들었다. 누구나 당신처럼 마음을 바꾸고 결정을 내린다고 되는 게 아닐 텐데 그런 사람은 어쩌냐고 슬퍼하기까지 한다. 심각하게 경기장에 올라와서는 한쪽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서 두 팔로 몸을 가려가며 아무 짓도 안 한 내게 겁먹은 척한다.
미쳐버릴 노릇이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간다. 도대체 어떻게 읽으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놀랍다. 책의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다시 읽어봐도 결론은 똑같다. 읽는 사람 마음대로 받아들이는 게 책이라지만 쓴 사람의 황당함은 구원받을 길이 없다. 만약 내 책이 수능 언어영역 지문으로 나오면 대단한 혼란을 만들지 않을까. 이렇게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니 모든 보기가 전부 정답 처리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지. 중심은 공동육아 어린이집도 육아휴직도 호주 생활도 아니다. 애초에 특이해 보이는 곁가지에 시선을 뺏길까 봐 최대한 보조로서만 활용했다. 전체 분량의 5분의 1이 넘지 않게 줄이고 또 줄였다. 애씀이 무색하게도 누군가는 여기에만 꽂혀서 안달이 난다. 아무리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지만 심했다. 아빠로서 육아를 함께하도록 생각의 변화를 일으키되 전부 다른 각자의 상황에 맞춰서 행동하자고 말했다. 어디에도 나처럼 똑같이 해야만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까 봐 나만의 방식으로 깨달은 것뿐이니 생각이 바뀌었다면 언제든 책을 떠나 자신의 길을 가도 된다고 수없이 반복해서 적어두었다.
한참을 따져봐도 해괴망측한 딴소리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이러다 답답해 죽을지 몰라 나름의 가설을 세웠다. 혹시 도망갈 구석을 찾아 헤매다가 이리된 게 아닐까. 아빠가 육아에 당연히 참여해야 한다는 말에 아니라고 할 순 없다. 편안함을 내려놓고 우선순위를 올려야 하는 건 알지만 쉽게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앞으로의 고난이 먼저 보이니까. 그럴 땐 적절한 핑계가 필요해지는 법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이유를 찾아 전체를 회피하려는 고도의 전략이 발휘된다. 난 얘처럼 육아휴직을 못 하니까,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못 보내니까, 호주에 가지 못 하니까 당장 함께하긴 어려워. 살면서 미치고 팔짝 뛰는 순간이 없었는데 예상이 맞아떨어진다면 처음으로 맞이하게 될 테다. 하지 않을 이유를 만들어 내는 건 쉽다. 앉아서 숨넘어갈 때까지 무한정 만들 수 있는 게 핑계다. 작정하고 덤비는 이에겐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정성과 마음을 다하자는 이야기가 밥벌이를 포기하면서까지 어떻게 육아를 하냐라고 돌아오면 막막해진다. 심지어 엄마의 입에서 나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이쯤에서 제대로 읽은 분이 ‘진짜 이 책을 그렇게 읽는 사람이 있나요?’라고 함께 놀라 주면 좋겠다. 슬프지만 있다. 책에 쓰인 경험은 나만의 것이고 중요한 건 함께하는 육아로 향하는 마음가짐의 변화라고 수십 번 써두었는데도 소용없는 사람이 있다. 책을 끝까지 읽었는지 의심이 된다. 분명히 꼼꼼히 읽고도 제대로 읽지 못한 거라면 요즘 등장하는 문해력 핑계를 대고 싶어진다. 그러다가도 엉플러에게 신나게 핑계 만든다며 욕해놓고 정작 내가 남 핑계 대는 것 같아서 마음을 고쳐먹는다. 더 잘 쓰지 못한 나를 탓하면서. 탓만 하면 아프니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순 없는 거라고 위로도 해가면서 달랜다. 간절한 마음이 담긴 리뷰를 보면 내 돈 주고 책을 못 사준 게 미안하다. 반대로 엉뚱하게 멋대로 읽고 남긴 자에게는 내 돈 주고라도 책을 도로 사서 뺏어오고 싶다. 딴소리를 사실로 믿고 주변에 그럴듯하게 전할까 봐 겁이 난다. 손쉽게 ‘이 책 별로예요’라고 툭 던지며 소문을 낼까 봐 자다가도 벌떡 깰 지경이다. 차라리 내 책이 나왔다는 사실을 몰랐으면 좋겠다는 헛된 희망도 가져본다. 엉뚱한 관심보다는 무관심이 훨씬 낫다. 드물지만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한 편의 글이 나올 정도로 깊숙이 뼈아프게 새겨진다.
황당무계한 수렁에 영혼까지 빠져가던 날 벌떡 일으켜 세울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쓴 책에 담긴 생각이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다. 저자인 나와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다. 아주 잘못 쓰지만은 않았구나 싶어 안도했다. 만약 ‘모든 아빠는 육아 휴직하고 호주로 가자!’로 보였다면 이런 연락이 오지 않았을 테니까. 하나 완벽히 회복되지 않은 자신감은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어쩌다가 나를 찾아오게 된 거냐고 불안해하며 물었다. 여기도 특이해 보이는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고 싶은 건 아닐까 해서. "아빠 육아를 주제로 인터뷰이를 찾던 중 가장 부합하는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아빠가 아이와 지내는 이야기를 넘어 아빠 육아라는 개념 자체를 고민하는 내용이 필요했었는데 선생님의 책 방향이 가장 적합해 보였습니다." 그제야 올렸던 가드를 내리고 안심했다. 써 내려간 진심이 전해져 그대로 인정받고 필요한 곳이 있어서 기뻤다. 세상을 향해 외친 목소리가 통해서 상쾌했다. 인터뷰는 준비부터 과정, 결과까지 만족스러웠다. 내 생각을 뿌리부터 지지하는 이와의 작업은 즐거웠다. 생각지도 않았던 출연료는 글로 번 돈으로 늘 그래 왔듯이 좋은 곳에 잘 쓰겠다고 의지를 전했다. 무엇보다도 적합한 매체에서 찾아왔다는 뿌듯함이 컸다. 인터뷰를 의뢰해온 곳은 여성가정부 산하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유튜브 채널 <젠더온>이었다.
작은 인정은 나를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처음 책을 쓰던 그때의 단단한 나로 돌아갔다.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생각이었다면 나까지 굳이 나서서 쓸 필요가 없었을 테다. 억지로 당연한 이야기를 꾸역꾸역 썼더라면 책으로 만들자는 곳이 한 곳도 없었으리라.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을 그렇지 못한 주위에 전하고 싶은 처음을 기억해냈다. 그러면서 비로소 포기했다. 모두에게 한 번에 인정받으려 했던 욕심을 내려놓았다. 유리한 것만 받아들이고 불편한 것은 피하는 자에겐 당장은 답이 없다. 시작부터 방패로 무장하고 달려드는데 쉬울 리 없다. 직접 앞에 서서 애를 쓰며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듣기 싫은 말은 한 번에 전해지기 어렵다. 처음엔 순수하고 소박했다. 누구라도 딱 한 번만 읽어주면 누구든 바꿀 수 있을 줄 알았다. 책만 나오고 나면 세상이 저절로 바뀔 줄 알았다. 순진함을 과감히 버리고 특기인 꾸준함을 장착한다. 세상에 필요하다고 믿는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지금 엉뚱한 소리 하는 자들이 변할 때까지 이어가겠다. 흔들리지 않고 옳다고 믿는 글을 쓰고 또 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