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을 꿈꾸는 너에게>
내 호주행을 들었을 때 주변에서 자주 언급했던 책이 있다. 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 직접 읽진 않았지만 대강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는 건너 들어 알고 있었다. 여러 이유로 한국을 떠나 호주에서 새 삶을 시작한 주인공의 이야기 정도로. 안 읽었지만 읽은 것과 진배없는 이유의 상통이기에 따로 부인하진 않았다. 물어본 이의 의도와 대답하는 나의 생각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정말 이곳에 '꼭 살아야겠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다. 내 인생에 이거 아니면 '절대 안 돼' 정도의 강렬한 무엇은 여태껏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지도. 상황이 맞아떨어졌고 다행히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여기 생활은 생각보다 좋았다. 물리적인 거리와 차단은 상상하는 것과 많이 다르게 펼쳐졌다. 기대 이상의 자유와 여유가 생겼다. 고독과 단절을 느낄 법도 했는데 그럴 틈이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한국'이라는 세계를 떠나 살아보는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때론 그리움도 느끼고, 때론 후련함을 느끼며 적절함 거리감을 즐겼다. 이번이 아니었다면 별생각 없이 그곳에서 남은 인생을 살아갔을 게 분명했다. 지금의 새로운 경험으로 두 배의 삶을 얻은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쉽게 만족하는 성격 덕분도 있겠지만, 타국에서의 생활은 가치 있는 일이었다.
꼭 호주여서 이런 느낌을 받는지는 모르겠다. 다른 나라를 가서도 그곳의 장점이 있다면 그것대로 감사하며 만족하며 지냈을지도. 아니면 한국 시골 어딘가 지내면서도 똑같은 기분으로 지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 보내기 좋은 가정과 만약은 사실 의미 없는 것이니 제쳐둔다. 그저 지금 이곳 호주의 삶은 한국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만 안다. 다시 한번 깨달은 재밌는 점이 있다. 우리의 삶은 어디에서든 명과 암이 있다. 추측만 했었는데 실제로 다른 곳에서 살아보니 정말 그랬다.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게 있었다. 아마 초기엔 나쁜 것도 새로움이라는 흥분제 덕분에 그리 나빠 보이지 않기도 한다. 내가 지금 그런 상태일 것이다. 밝은 쪽이 훨씬 더 커 보이고, 어두운 쪽은 충분히 데리고 살아갈 만하다. 언젠가는 두 상반된 면을 정확히 마주할 날이 올 테다. 그렇다고 해서 크게 변화가 시작될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의 생활에서도 명확히 꿰뚫어 보았지만, 그놈의 관성에 굴복당해 적응하며 살아갔으니. 완벽한 천국이 없다는 것 정도는 이제 안다.
내 호주 살기의 핵심은 '그럴 것 같아'에서 끝나지 않고 몸을 움직여 '실제로 지금 이곳에 있다'는 점이다. 양쪽의 삶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에만 불과했던 전과 다르게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다른 쪽을 몰랐을 때와 지금은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이런 상황에 '한국이 좋아? 호주가 좋아?'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명확한 이유로 완벽한 선택이 이루어지는 갈림길은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에 존재하지 않으니. 이쪽 길로 가든 저쪽 길로 가든 고를 뿐이다. 이유와 정당성은 본인만이 가지고 있다. 믿음과 같아서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가치다. 할 일 없는 사람이나 시간이 지난 뒤 굳이 돌아와서 '그것 봐, 이때 이렇게 해야 했잖아.'라고 할 뿐이다. 이러면 아마 살면서 계속 노심초사할 테다. 항상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하지만 그런 건 없다.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 그냥 걸어가는 것이고 일은 벌어지는 것이다. 잘못했기 때문도 아니고 잘했기 때문도 아니다. 본인이 그 길을 믿고 걸어가면 다 옳은 길이다.
뒤늦게 털어놓지만 난 <한국이 싫어서>보다는 이 책에 더 많이 영향을 받았다. 동갑내기 작가의 솔직하고 담담한 문체와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비슷한 구석이 별로 없어서 그대로 가져다 쓰기에는 아쉬웠지만, 오히려 당연했다. 그와 나는 다른 사람이기에. 작가는 용기 내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며 원하는 것을 쫓아 살아간다.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두가 원하고 바라는 바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길에 있는 내가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다음 발걸음을 떼고 있는지는 본인만 알고 있다. 걸음걸음마다 불안하고 이게 맞나 싶을 때가 무척이나 많지만, 누구도 도울 수 없다. 주변의 지지와 응원에 잠깐의 위안을 얻을지 모르지만, 결국 내디뎠을 때의 감촉은 혼자서 느낀다. 온전히 느끼고 뒤돌아보았을 때 찍힌 발자국에 대한 소회는 오롯이 자신의 것이다.
나는 어디로 발을 내디딜 것인가. 정해지지 않으면 덜덜 떠는 내게 확실한 걸 쥐여주지 않는 세상. 피하고 싶지만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불확실성이 우리네 삶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천만다행으로 어디에도 정해진 답은 없다. 나만 모르지 않고 전부 모른다면 괜찮다.
<이민을 꿈꾸는 너에게> (박가영) - 2019 완독
83년생 동갑내기로서 저자에게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나와는 정말 다른 삶을 한국에서 살았었고, 지금도 완전히 다른 곳에서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 지금 내가 어렴풋이 바라고 꿈꾸는 삶이 지금 저자의 삶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처음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지만, 지금의 저자를 있게 한 저자의 피나는 노력은 충분히 느꼈다. 찾아온 기회와 행운도 있었겠지만, 그곳을 향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만났다. 많은 사람이 저자와 비슷한 시도를 해왔고 나도 할지도 모른다. 저자의 소중한 조언 중에서도 으뜸은 ‘너에겐 너만의 이미 스토리가 있다’였다.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 최소한 나는 알고 있어야 한다. 덕분에 얻은 용기는 한 번 시도를 해봐도 죽지는 않겠다는 소감에서 건졌다. 어설픈 혼자가 아닌 둘이서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어 다행이다.
삐딱한 표지 사진 한 장 없는 서평을 고집스럽게 쓰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