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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Mar 26. 2023

요즘 젊은것들은 너무 버릇이 없어

<90년생이 온다>

'세대 차이'


나와 이 말은 언제나 관계가 없을 줄 알았다. 늘 젊은 세대로만 존재할 줄 알았다. 하나둘 나이를 먹으면서 저절로 아래 세대와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때를 지나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생각에 그들을 이해 못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나는 그들이 어색하거나 외계 생명체 같지 않았다. 그저 얼마 안 되는 과거의 나 정도라고 여기면 크게 이상하지 않았다. 나도 저 땐 그랬겠다고 하면서 오히려 과거를 추억하기도 했다. 가끔 그들과 별로 다른 게 없다고 여겨질 때면 남은 젊음에 기뻐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동안 '세대 차이'와 가깝지 않게 지냈다.


요즘엔 '세대 차이'를 느낀다. 밖에서 남에게 겪지 않고 집 안에서 벌어진다. 바로 어린 아들과의 수많은 차이 덕분이다. 내 상식과 기준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내 피가 섞인 자식인데도 어렵다. 괜히 어딘가 닮았다는 생각을 지우고 전혀 다른 독립된 인격체라고 여겨야 겨우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나와 다른 게 당연한 데도 자식이라는 생각에 간극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동안 젊은 친구들에게 느꼈던 정도의 거리나 낯섦이 아니다. 나와 아들의 나이 차이가 30년씩이나 되기 때문이려나. 특정 기간 이상이 차이가 나면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세대 차이'를 느끼고 마는 걸까.


어쩌면 사회에서 만난 다음 세대에게 적당한 관심만을 두었기 때문에 별 차이를 못 느꼈을 수도 있다. 조직의 리더로서 관리하는 역할이 아닌, 그저 동료로서 서로 다른 위치에서 각자의 일을 했기 때문에 별로 부딪힐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자식은 그렇지 않다. 사사건건 모든 상황에 서로 맞닥뜨린다. 포기할 수도, 모른 척할 수도 없다. 필요한 것은 이해와 인정이다. 이걸 어른과 아이의 차이 때문이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세대 차이'라고 불릴 수 없는 걸까?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차이가 나야 '세대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을까.


인생에 처음 맞이하는 나보다 어린 사람과의 마찰 속에 한 권의 책이 떠올랐다. 오래전 열풍이 불어 소위 베스트셀러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사회생활 하면서 모르면 안 될 것 같은 강박관념으로 읽었던 책. 제목에서 풍기는 대로 기성세대와는 다른 새로운 젊은 세대를 파고드는 내용이다. 진작에 '세대 차이'를 알아보고 극복하기 위해 쓰였다. 기억은 여기까지가 전부다. 솔직히 지금은 제목을 통해 추측한 내용 말고는 더 생각이 안 난다. 인상 깊지 않은 흐릿한 기억 탓에 좋은 책이었는지 아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 당시 책을 덮고 나서 든 생각은 이거였다. '정말 90년대생도 이 책에 동의할까?'


이 책은 같은 90년대생이 아닌 위 세대의 관찰로 쓰인 책이다. 제삼자의 입장으로 나름 객관적인 근거를 통해 이러이러한 특징이 있다고 했을 것이다. 그때의 내 불편한 마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젊은 세대를 알기 위해 한 권의 책에만 몽땅 기대어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에 머물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에게 최소한의 등불이자 예시가 될 수는 있겠지만 마치 이게 정답인 양 구는 게 싫었다. 만약 이 책이 틀렸다면? 해당 세대의 일부만 이렇다면? 한 사람을 정의하기도 어렵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스스로 잘 파악이 안 되는데 말이다. 하물며 몇십 년대 태어난 수많은 사람을 몇백 장의 글자로 정의할 수 있을까 싶었다.


90년대생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이 이 책을 통해 이루어졌을까? 애당초 나는 이런 세대 저런 세대 구분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만드는 게 일이고 그래야 돈을 버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온갖 트렌드와 유행을 향한 내 삐딱한 시선이다. 모두가 좋다고 하면 일단 싫다고 시작하는 못난 노력이 몸에 밴 탓에. 사람을 이렇다 저렇다 크게 뭉뚱그려서 보는 건 간편하다. 하나 구별되는 기분은 어떨까. 나랑 동떨어져 있는 바깥의 남이 정한 특징에 맞아떨어지고 싶은 이가 있으려나. 나라면 나랑 비슷한 점이 눈곱만큼도 없는 타인의 잣대가 불편할 것 같다.


요즘 애들은 이렇고 저렇다고 내뱉고 싶은 욕망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고 한다. 저 멀고 먼 고대부터 '젊은것'에 관한 어르신의 이해하기 어려움이 기록되어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버릇이 없다.’ 아마 이 책도 그 정도 맥락으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언제나 있었던 젊은 세대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시선이 여기도 담겨있다. 기존 세대와 엄청 다르고 특별해서 연구하고 관찰해서 알아내야만 하는 존재로 그려져 있다. 계속 찾아올 00년대생이나 10년대생은 안 그럴까? 매년 나오는 트렌드 코리아처럼 계속 나와야 하는 시리즈물이려나.


내가 아들을 100% 아는 순간은 앞으로 오지 않을 테다. 그래도 꿋꿋하게 애써 나갈 것이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좀 더 느리고 큰 노력이 들겠지만, 작은 부분부터 천천히 소통하며 지내면서. 내가 아들을 이해하는 한쪽 방향만 이루어져서 될 일은 아니다. 내가 다가가는 과정에서 아들도 나를 느끼고 알아가야만 우리의 온전한 공생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물며 가족 내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이럴진대 사회를 이루는 세대 간의 화합은 더욱 큰 노력이 필요하다.


한쪽의 시선으로 쓰인 책 하나를 읽고 '나 이제 너희들 잘 알아'라는 태도로 대하는 일은 없기를. 어렵고 느리겠지만 더 많은 접촉과 대화로 서로를 보여주고 다름을 느끼면서 나아가면 좋겠다. 편의상 덩어리째 대충 보는 행위는 아무것도 달라지게 만들지 않는다. 편안함 속에는 안주만이 있을 뿐이다. 변화는 불편함 속에서 일어난다. 나와 다른 이를 각각 하나의 자아로 보면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쉽지 않겠지만 인간의 역사에 언제나 존재하는 서로 간의 '불편한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가 많아지기를. 나도 거기에 들어가길 바라며.




읽고 남는 건 받은 질문과 했던 고민뿐

삐딱한 표지 사진 한 장 없는 서평을 고집스럽게 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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