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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Mar 16. 2023

그 기준은 누가 정했는데?

<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무언가를 마주하면 이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먼저 생각한다. 그게 어떤 일이든 말이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할 것 없이 우선 구분을 먼저 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조건 나누고 보는 성격은 참 어찌하기 어렵다. 이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나누는 '기준'이다. 어딘가에 그어 놓은 중앙선을 기준으로 한쪽은 좋은 거, 반대는 나쁜 거라고 판단한다. 그럼, 이 '중앙 기준선'은 정확한 걸까? 평소에는 이런 의구심과 망설임도 없이 이건 좋은 쪽인 '선'이고 저건 나쁜 쪽인 '악'이라고 바로 단정 짓는다.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내 안에는 명확하게 그어져 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아니 그전에 도대체 이 선은 어떻게 정해진 걸까.


태어나 성장하면서 백지상태에서 다양한 것을 접한다. 가정, 사회, 교육, 환경 등 노출되는 많은 것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게 자라다 보면 어느새 내 안의 어떤 기준선을 가진다. 사람이 모두 다르듯이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의 것을 들여다볼 수 없기에 아마도 나와 비슷하겠거니 지레짐작한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이에 관한 의견을 나누면서 상대방의 기준을 본다. 같을 때도 있지만 분명히 다를 때도 있다. 만약 나 빼고 대부분 사람이 유사해 보이면 자신의 기준을 들어내기 꺼려진다. 괜히 나만 다르다는 생각을 쉽게 꺼내기 어렵다. 주춤하길 반복하다 내 안의 기준을 조금씩 영점 조정한다. 남들과 비슷해지면 편안해진다. 이렇다 저렇다 다름을 설명할 필요가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시선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니까. 처음의 각각 날 선 기준이 조금씩 무뎌지면서 대세를 따른다. 그럴수록 대세가 옳은 것이 되고, 아닌 것은 틀린 것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에 가졌던 나만의 기준선은 흐릿해진다. 예전에 그것을 가졌었는지 모를 만큼 희미해져 간다. 나 말고도 다수의 사람이 따르는 기준만이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다. 가끔 튀는 사람을 보면 여기에 맞추라고 강요까지 하고 만다. 주류에 맞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면서 지내다 보면 이게 정말 맞는지에 대한 의문은 하지 않는다. 누가 물어봐도 깔끔한 설명은 어렵다. 스스로 경험하고 깨달아서 세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남들도 그렇게 하니까. 그냥 느낌이 그러니까.' 정도로 얼버무릴 뿐이다. 이 와중에 그 자체에 대한 의심을 던지기는 어렵다. '만약 내가 세운 나눔의 중앙 위치가 옳지 않다면?' 이런 의문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상상해 보자. 우리와 전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사는 세상에 홀로 떨어지는 모습을. 나쁜 것과 좋은 것이 전혀 다른데 왜 그런지 알 수 없다. 나 말고는 모두 그렇게 믿고 살아간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내 안의 '선'과 '악'의 절대적인 기준이 흔들린다. 시간이 흘러도 우린 기존의 기준을 계속 지켜가며 살 수 있을까. 결국 그들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지 않을까? 그렇다면 '절대적'이라는 말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굳이 거창한 상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실제 세계에도 이런 기준점의 변화는 계속 있었다. '신분', '계급', '노예', '여성'. 바뀌기 전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았고 그것에 대해 누구도 나쁘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뀌고 나면 바뀐 세상에서는 그 과거의 무지와 악랄함에 혀를 내두른다. 이렇게 보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누군가 정해 놓은 것을 따라 한 내 안의 기준선'이 좀 얄궂게 보인다. 이것만 철석같이 믿고 좋은 거, 나쁜 거 했던 게 민망해진다. 무슨 자신감으로 선과 악을 쉽게 판단했던 걸까? 편한 대로 내게 유리하면 선으로, 불리하면 악으로 몰아갔던 것은 아닐까. 내게 해를 끼치는 남의 다른 기준에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바꾸라고 반대했던 것은 아닐까.


좋은 생각을 담았다는 오래된 이 책을 '별다른 이야기가 있겠어?'라고 집어 들었는데 곧 당황했다. 다른 세계관을 가진 이국의 선과 악은 내 것과 달랐다. 실제로 그곳에 사는 사람은 이 이야기에서 교훈을 담아갈 수 있는지 궁금했다. 황당한 전개와 결론으로 내가 가진 기준선이 허망해졌다. 세월이 흘러서일 수도 있고 그곳과 내가 사는 세상이 달라서일 수도 있다. 이런 차이가 있을 줄은 몰랐다. 어디서도 선과 악은 명확하게 일치할 줄 알았다. 어리석고 어설픈 생각을 제대로 건드렸다.


'영원'한 것과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을 다시 상기했다. 내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면 다른 이도 그의 것을 그만큼 믿을 것이다. 항상 의심해야겠다. 이 세상의 기준들은 내가 정한 게 아니다. 누군가의 편의와 판단으로 미리 정해진 것이다. 그동안엔 따라 하기 편해서 맹신했다. 귀찮고 불편하겠지만 다시 한번 들여다봐야겠다. 정말 선인지 악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런 기준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읽었던 그때 그 순간의 감정과 느낌


<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후안 마누엘/자작나무) - 2019 완독


오랫동안 집에 두었던 책을 읽어 끝냈다. 스페인의 명심보감이라는 이 책은 우리가 들어봤을 법한 우화나 옛날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전반적으로 결국 우리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지혜를 담고 있다. 하나 정서가 달라서인지 다소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나, 옳은 이야기를 하는 게 맞는지 갸우뚱할 때가 자주 있었다. 


선과 악을 구분할 줄 몰라서 어기고 사는 것은 아니다. 나누어 지키며 사는 게 종종 불편하고 당장 이득을 보기 어려워서다. 문득 이런 선/악은 언제부터 누가 구분을 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누구나 저절로 타고나는 대로 느낄 수 있는 걸까. 아니라면 누군가 필요에 의해 나눈 것을 어쩌다 보니 따르게 된 걸까. 애매모호한 정체불명의 것을 모른 척 그대로 삶의 기준 잣대로 삼고 살아가는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읽고 남는 건 받은 질문과 했던 고민뿐

삐딱한 표지 사진 한 장 없는 서평을 고집스럽게 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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