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아무리 틀을 벗어난 상상을 하려 해도 깨지지 않는 것이 있다. 당연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원래 그런 것이라고 기저에 깔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이런 상식들. 무언가를 이루고 얻기 위해서는 노력과 인내의 과정이 필요하다. 형태는 다르지만 인간은 가족이라는 모습으로 모여서 살아간다.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한 쾌락은 상호 허락된 감정의 주고받음 속에서 얻을 수 있다.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당연지사 한 우리 사회의 근간적인 원리는 무수히 많다. 대부분의 우리 삶은 이런 것을 기반에 그대로 두고 뻗어나가는 가지에 불구하다. 이런 기본적인 원칙과 원리를 벗어나거나 어긋나게 하려는 시도는 다양한 억압에 짓눌리게 된다. 전혀 힘들이지 않고 대단한 성과를 노리는 행위는 인정받지 못한다. 가족의 전형적인 모습과 다른 무리는 주변으로부터 무례한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한 번에 여러 사람과 동시에 즐기기 위해 만나는 관계는 진정성 있는 사랑으로 비추어지지 않는다. 이런 위험한 생각은 스스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큰 범죄를 저지르는 느낌을 받는다.
엉뚱한 생각이 시작된 김에 오늘은 한번 마음껏 상상해 보자. 왜 무언가를 편하게 날로 먹으면 안 되는 걸까? 어차피 누군가와의 경쟁에서 이겨서 얻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방식이 좀 다르면 안 되는 걸까. 지금은 사기와 편법이라고 여기지만 어쩌면 최고의 가성비로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꼭 힘들고 어려운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달성해야지 그 결과가 가치 있는 걸까. 가장 어려운 관계인 가족을 꼭 유지하고 살아야 할까? 가족으로부터 생겨나는 다음 세대를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 낼 순 없을까.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보다 자유롭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새로운 생명은 가족 안에서가 아니라 별도의 탄생 시설을 통해 생겨나는 식으로. 지금과 같은 혈연관계가 사라지고 각자의 존재만 남는다. 남녀 간의 사랑도 오로지 쾌락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면? 가족이 사라지니 일부일처제 같은 제도에 신경 쓸 필요가 없이 즐기면 된다. 남녀의 만남은 오로지 유희를 위한 본능 때문이다. 한 번에 각각 여럿을 만나든 동시에 한꺼번에 만나든 선택의 문제일 뿐.
이런 세상이라면 어떨까? 지금의 우리 상식에 따른 기준을 갖다 대서 판단하지 말아 보자. 오히려 이것들이 우리의 상식이 된다면? 실제로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변함없어 보이는 단단한 가치는 태초로부터 영원했을까. 분명히 변해오지 않았으려나. 혹시 그동안 변하지 않았더라도 나중에는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과 다른 세상,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무려 약 100년 전에 쓰인 놀라운 책에는 위에서 늘어놓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모두 일어난다. 심지어 일부분에 불과하다. 우리의 상식을 아무것도 가져다 쓸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인 창조의 세계가 펼쳐진다. 진정한 '신세계'인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도 어색하다. 받아들이기 버겁고 때론 역겹기도 하다. 하지만 그 세계에 점차 익숙해지면 오히려 현실 세계에 의심이 생긴다. 무엇이 맞는 건지 가치관에 혼란이 온다. 책 속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내 모습과 겹친다. 아무 의심 없이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게 된다. 앞으로도 그냥 이 세계에서 갇힌 듯 살아가면 되는지 궁금해진다.
아쉽게도 우린 과거에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출발선에서 시작한다. 그 이후의 삶은 내 의지와 선택이지만 시작점의 위치를 바꾸진 못한다. 세계는 많이 정해져 있다. 우리가 이해하든 못하든 간에 대부분이 고정되어 있다. 간혹 바꾸려는 시도가 있지만 다양한 이유로 대다수에게 진압되고 만다. 단순히 안정된 틀을 바꾸려는 쓸데없는 시도라는 취지로 억눌리는 게 아니다. 옳지 않다는 가치 판단에 따라서 '악'으로 치부되며 제압된다. 고통과 인내가 없는 성취가, 가족을 통하지 않은 새 생명이, 구속하지 않는 남녀의 사랑이 그렇게 몰려간다. 선과 악은 그 세계에 속해있는 의미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어떤 것이 선이고 악인지 통념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신세계가 온다면 모조리 뒤집힐 것이다.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면서 다가올지 모를 그때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세계를 맞이했을 때 남들보다 먼저 치고 나가려면 그래야 하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새로운 '멋진 신세계'가 쓰여야 할 테다. 그 책을 내가 써보는 악랄한 상상에 빠져본다.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문예출판사) - 2019 완독
처음에는 당혹스러운 내용이 계속 이어졌다. 읽어 내려가기 어려울 정도로 버겁고 역겨운 내용들이 나오다가 곧 적응하고 소설 속에 푹 빠져버렸다. 거의 한 세기 전에 이런 내용이 쓰였다니 놀랍다. 극단적인 설정이 과한가 싶다가도 지금의 우리 모습과 닮은 곳이 있어 섬뜩했다. 어느 순간에는 좀 헷갈리기도 했다. 고통과 인내 없는 성취와 행복은 가치가 없다는 것이 꼭 그래야만 하는 건가 싶었고, 가족과 부모에 대한 관계가 사라진다면 거기서 오는 여러 감정이 배제될 텐데 과연 좋은 것일까. 어설픈 상상을 해 보았지만 어려웠다.
작가는 대단한 시선으로 이 책을 아주 오래전에 써 내려갔고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많은 생각과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삶과 너무 다르지만 왜 이런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 현재에 기반한 기발한 공상과학소설이다. 과학의 발전과 인간 윤리, 도덕, 사회 전반에 걸친 상식을 뛰어넘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앞으로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다가올지 차갑고 무서운 메시지를 준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모두가 한 번쯤 꼭 읽어보면 좋을 책.
삐딱한 표지 사진 한 장 없는 서평을 고집스럽게 쓰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