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그동안 고생 많이 했네."
얼마 전 아내에게 처음으로 들은 말이다. 서로의 자리를 바꿔 지낸 지 3년이 조금 넘어가는 날이었다. 급하게 글을 쓴다는 이유로 잠시 육아와 살림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나 없이 아이와 단둘이 며칠을 보낸 뒤 그녀가 털어놓은 진심은 옛날을 돌아보게 했다. 고생이라. 처음 아들과 꼭 붙어 있기 시작하던 그땐 그랬지. 이제는 추억이라 떠들 수 있는 장면을 웃으며 떠올렸다.
육아를 하는 동안 매일이 그랬다. 눈을 떴다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한 게 없었다. 정확히는 날 위해 한 일이 없었다. 기상과 함께 온전히 내 하루는 아이의 것이 되었다. 한 사람의 생활을 돌아가게 만드는 활동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대단한 걸 하는 게 아닌데도 대단히 다른 걸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일어나 아이를 씻기고 밥 먹이고 옷 갈아입히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옷가지들을 개고 아이와 같이 놀고 다시 밥 먹이고 씻기고 옷 갈아입히고 함께 자고. 너무 똑같아서 조금의 변화도 알아채기 어려운 일상. 변하는 건 날짜와 계절뿐이었다. 아, 깎지 못해 길어지는 수염과 손발톱도. 이따금 기운이 조금 남아 아이보다 늦게 잠드는 밤이면 그제야 제쳐 둔 질문이 찾아왔다.
'오늘 나 뭐 했지?'
아이의 성장을 온몸으로 느끼는 기쁨은 굉장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눈앞에서 계속 볼 수 있는 건 축복이 맞았다. 엄마보다 아빠를 점점 더 찾는 광경은 어떤 절경 못지않았다. 비워 두었던 내 자리를 찾아간다는 보람은 자주 날 쓰다듬었다. 그런데도 차면 빈다는 세상의 진리처럼 한쪽이 채워지면서 어쩐지 다른 쪽이 비는 게 느껴졌다. 나로만 가득 찼던 지난날과는 판도가 달라진 전업 아빠의 삶은 어딘가 공허했다. 풀리지 않는 복잡한 속을 글자에 털어놓으면서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글이 날 도운 건지 내가 글을 도운 지는 아직도 불분명하지만, 답 없는 잠자리 질문은 발길을 끊었다. 글이나마 남게 되자 고생만 하고 남은 게 없다는 허전함은 사라졌으니. 하지만 간신히 바로 서고도 여태까지 중요한 걸 빼먹은 줄 몰랐다. 고생하는 날 이해하게 되었다는 아내의 최근 고백을 듣기 전까지 전혀.
나보다 훨씬 먼저, 배 속 아이의 탄생과 동시에 아이와 홀로 남겨졌던 아내.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한 어린 자식과의 밀착 동거는 쉽지 않은 날의 연속이었을 테다. 내 일이 아니라 여기며 머리로만 쉽게 굴려서 결론을 내리고 돌아섰다.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거라며. 우리 말고도 다 그렇게 산다는 간편한 핑계를 꺼내 보이며. 예쁜 아기와 엄마로 지내는 아름다운 모습이 당연하다고 확신하는 시간을 보내왔다. 어쩌다 흔들리는 그녀를 위로했지만 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안쓰러운 상황을 향한 불만은 있었지만 시원한 변화를 위한 행동은 멀리했다. 내게서 나와야 할 무언가가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가끔 미안해하는 마음이 스쳐도 따로 전하지 않았다. 잘못을 하고 있다는 인정이 없었으니까. 아내가 티를 내지 않으면 모르는 척 둔감을 핑계로 아내를 살피지 않았다. 나와 아이에게 웃어 주면 다 괜찮은 줄만 알고.
나와 비할 바 없는 오랜 기간을 혼자 버텨 온 그녀의 자리를 뒤늦게 맡았다. 자라는 아이와 모자란 나 사이에서 방황하며 지냈다. 자책과 반성은 마를 줄 몰랐다. 그나마 하고 있는 단 하나의 일을 망칠지 모른다는 불안은 생각보다 컸다. 자신에게 사용할 시간은 늘 빈곤했다. 스스로 돌보지 못해 줄어드는 자존감을 키우긴 역부족이었다. 밖에 나가지 않아 가뜩이나 좁은 속이 더 좁아졌다. 원래도 나 말고는 보지 못했는데 점점 시야의 폭이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내가 없을 땐 누가 대신 아이를 돌보았겠냐는 의문을 한 번도 안 가졌다. 아내가 손에 쥐여 준 정답 같은 힌트를 읽고서야 깨닫는다. 옆에서 알아주는 남편 없이도 묵묵히 지내온 아내의 시간을.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 그리고 치열한 맞벌이 생활 속의 주 양육자까지. 난 그녀의 정성을 고마워하지 않았다. 네 일과 내 일은 다르지 않다고 일축하며. 그따위 시시비비가 설 자리가 아니었는데도. 그녀도 처음이었을, 우리의 아이를 키워내는 외로운 순간을 안아 주지 못했다. 이미 묻어 두고 지나갈 뻔했던 아내의 아픔을 직접 겪어 보고 나서도 또 놓칠 뻔했다.
육아하는 아빠가 된다는 건 단순한 역할 변경이 아니다. 아이 옆에 있는 시간을 늘리는, 일과의 변동만도 아니다. 가까운 옆 사람을 이해하는 시작이다. 부부가 동등해지는 출발점에 서려는 몸가짐이다.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영원하지 않을, 뜨거움만으로 하나가 되었다. 두 사람은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달라 받아들이기 어렵다. 둘 사이에 축복 같은 아이가 태어나도 변하는 건 없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서로 제대로 알려는 자세가 빠지면 새로운 생명의 돌봄은 안타깝게 흘러가기 쉽다. 누구 몫이 더 크다느니 누가 더 억울하다느니 차갑게 따지는 슬픈 장면으로. 오히려 육아는 절호의 기회다. 식어버린 열정을 대신할 끈끈한 연결 고리로 쓴다면. 사랑하는 아이를 중심으로 단단해질 수 있다. 변치 않을 공통점을 심어 두고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는 놀라운 관계로.
평등과 배려가 부족한 세상이다. 다르게 태어난 남녀는 서로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만약 남녀가 붙어 있는 가정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면 어떨까. 자신의 아이를 함께 돌보는 것만으로도 이해의 수준이 높아진다면. 여성과 남성의 기울어진 차이를 모르는 체하지 않는 인정이 집에서 생겨난다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그렇다면 해볼 만하지 않을지. 부족한 시선과 손발을 육아로 돌리는 아빠가 늘어난다면 달라질 거라 믿는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엄마에게 치우치는 게 당연하지 않다고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는 아빠. 그들이 세상에 드러나는 딱 그만큼,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아빠가 이끌어낼 변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의 미래, 아이가 배운다. 난 엄마가 날 키우고 아빠는 돈만 버는 줄로만 알았다. 보고 자란 게 전부여서 그랬다. 우리 아들은 우리 부부 누구와 시간을 보내도 어색하지 않다. 한쪽이 없다고 불안해하지 않는다. 엄마와 아빠가 같이 자신을 길러 내는 걸 경험으로 깨닫고 있다. 이렇게 자라 어른이 된다면 다음에도 똑같이 이어질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그저 내 아이 하나 키워서 세상에 내보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우리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귀한 사람을,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고 부모가 되어 또 그다음을 이어갈 희망을 내보내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많아지는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여기저기서 애를 쓴다. 개인의 걱정은 크지만 마땅한 실천은 부족하다. 멀어서 할 수 없는 걸 바라기보단 가까워 바로 할 수 있는 걸 해보면 어떨지. 살아가는 이곳을 더 낫게 만드는 여러 일 중 하나인 육아 참여처럼. 함께하는 육아가 만드는 기적은 끝이 없다. 아빠가, 아빠가 되면 근사한 변화가 벌어진다. 아이에게 아빠를 되찾아 주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부부간의 이해를 넘어 남녀의 간극을 좁혀 준다. 아빠가 많아진다는 건 아무리 봐도 좋은 일이다. 더 늦기 전에 아내에게 그때 혼자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다. 더 좋은 일을 만들기 위해.
함께하는 육아를 만드는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 저자 홍석준
*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원고료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전액 기부합니다.)
'모임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나.'
초청받았을 때 처음 떠오른 생각이다. 나같이 특이한 사람이 여럿 있어야 할 텐데 가능하려나. 육아하는 아빠로 돌아선 지 꽤 지났지만 여긴 여전히 허허벌판인데. 숨기지 못한 걱정이 앞섰고 참지 못해 말로도 꺼냈다. 참여할 만한 인원 찾는 게 만만치 않겠다고. 남 걱정 안 하는 나지만 유독 이 모임은 신경이 쓰였다. 흐지부지되면 기꺼이 참여하려고 꺼낸 의지가 머쓱해질 것 같은 마음의 손해가 아른거려서.
아빠들을 다 모아 모임이 성사되었다는 소식은 믿기 어려웠다. 어디서 어떻게 모았을까. 육아하는 아빠가 이 정도나 있다니. 첫 모임 일정을 안내받고도 의심이 가득했다. 숨어 있느라 만나기 어려운 이 아빠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무슨 사정이 있어 비주류의 대명사를 꿰차고 있는 건지. 혹시 절망에 가득 차서 구원을 바라고 모여든 게 아닐까. 서로 힘든 무리는 남을 도울 힘이 없을 텐데. 나도 아직 내 자리가 정리가 안 돼서 어색하고 떳떳하지 못한데 전부 이러면 대화가 진행이 되려나. 나처럼 육아하는 날 알아주는 곳이 없어 억울하고, 지질한 마음을 풀지 못해 답답해서 나오는 사람도 분명히 있겠지? 방법이 없어 수다라도 떨면 마음은 잠시 달랠 수 있으니까. 어두운 상상만 잔뜩 안은 채 쭈뼛쭈뼛하며 첫 만남을 시작했다.
전혀 아니었다. 진심 가득한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누구도 그러려고 모이지 않았다. 아빠라는 역할도 하는 남자의 이야기. 목소리를 낼 곳이 없어 담아두었던 신념.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이 시대의 특이한 아빠로 살아가는 속사정. 지금의 모습을 향한 의문, 망설임, 고민, 후회, 반성, 막막함, 그리고 다짐과 소망까지 다채롭게 채워졌다. 살면서 가질 수밖에 없는 수많은 상념을 나누면서. 결국 이 자리는 자기 삶을 걸어가는 사람의 모임이었다. 어디서도 할 수 없는 자유로운 말들을 주고받으며 허락된 짧은 순간을 함께했다.
같은 자리에 있는 우리는 서로를 열어 두고 바라봤다. 옅지만 비슷한 테두리 안에 속해 있기에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웃어 주며. 그 시간이 좋았다. 남자로서도 아니고 아빠로서도 아닌,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할 수 있어서. 이 사람은 이렇구나, 저 사람은 저렇다며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편안했다. 그제야 알았다. 우린 이러려고 만났구나. 애초부터 이러려고.
이 자리를 빌려 세상에 필요한 뜻깊은 모임을 만들어 이어가는 <서울문화재단>과 아무나 할 수 없는 역할을 기꺼이 맡아 꾸려 가는 윤푸름, 최형욱 예술가에게 감사와 존경을 전한다.
<후기의 후기>
작년 중순 독자분께 받은 제안으로 탄생한 글이다.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시각 예술가로 활동하는 최형욱 님의 연락을 받았다. '변화하는 시대 육아하는 아버지들의 대화'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새로운 모임에 초대했다. 전업 아빠로 지내는 내 생활과 첫 책 『아빠 육아 업데이트』의 출간을 알고 있었기에 나의 경험과 문제의식을 나눠주길 바랐다. 이 시대의 육아하는 아빠로서 사명감을 느끼고 없는 시간을 내어 참석했다. 허심탄회하고 알찬 모임이 이루어졌다. 아쉽게도 마지막 대면 모임에는 멀리 있느라 참석할 수 없었는데, 작년 말 방문한 한국 일정 속에 다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주어 화면으로만 보던 얼굴을 마주했다. 편안했다. 이러니 저러니 설명할 필요 없이 그 안에 머물 수 있는 순간이. 아빠로 살아가는 나를 잡아둔 또 하나의 책자가 생겼다. 더 많은 아빠가 계속 생겨나기를. 우리의 시간이 씨앗이 되기를.
※2022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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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제가 쓴 책이 나왔습니다. 애만 만들고 아빠인 척하던 제가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아닌 척 모른 척했지만 저도 그저 엄마가 애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아져서 함께하는 육아가 당연해지는 날을 꿈 꿉니다. 책 표지에 적어 둔 것처럼 인세 수익은 모두 필요한 아이들에게 기부합니다. 다른 욕심 없이 오로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세상이 변하길 바랍니다. 아이가 있거나 아직 없거나 다 컸거나 심지어 없을 예정이어도 읽으면 좋습니다. 엄마 아빠가 함께하는 육아를 아이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해야만 바뀌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분들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순간을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