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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Mar 08. 2024

나에겐 남, 남에겐 나

<위키드(Wicked)>

어떤 이야기든 맨 마지막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나쁜 악당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심술과 잔인함을 똘똘 싸매고 나왔겠구나 싶도록 생긴. 주인공의 선함과 정의를 쏟아부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세상 밖으로 내쫓거나 없애버렸다. 언제나 내 마음은 옳다고 정해져 있는 한쪽에 함께 서서 그에게 이유 모를 저주와 분노를 쏟아냈다. 막이 내리고 나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완수되었어야 할 필연적 임무가 끝나버린 그 느낌. 어쩌면 우리는 이 상쾌함을 위해 열심히 이야기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지도 모른다. 화장실에서 나오며 물을 내리는 것처럼. 혹시라도 지저분한 흔적이 남을까 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리 보내며 얻는 통쾌함을 위해.


살면서 겪는 여느 스토리도 다르지 않았다. 영화든 드라마든 게임이든 거의 그랬다. 들어서면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주인공 입장으로만 즐겼다. 반대쪽은 궁금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악할 거라 믿었고, 때론 그런 거 없이도 그냥 나쁘다고 치부했다. 그래야만 전개가 되었고 악당의 사정은 봐줄 필요가 없었다. 이야기 속이 아닌 현실에서도 반복되었다. 앞길에 거치적거리는 수많은 타인은 모두 적이었다. 딴지를 걸며 괴롭히고 방해하는 그들은 처단당해야 마땅했다. 인생의 주인공은 나였고, 그들은 나를 위한 주변 인물일 뿐이었다. 즐겨오던 이야기들처럼 조연의 사정은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부터 타인과 삶을 공유하게 되었다. 오로지 나를 중심으로 살아오던 내게 틈이 생긴 것은 이때부터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가족을 만들면서 변했다. 함께 하는 시간관 공간 속에 항상 다른 이의 입장이 있었다. 나와 전혀 다르지만, 그 가치는 한 치도 모자람 없이 동일했다. 다름을 느껴가는 만큼 상대방의 중요함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나만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내 책의 주인공일 뿐이었다. 모두에겐 각각의 책이 있었고 거기선 모두가 영웅이고 용사였다. 눈이 빠지라 내 것만 보며 살았었는데 그제야 남의 것이 보였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적절하게 이 책을 그즈음에 만났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초록마녀'를 기억하는가? 가물가물해도 상관없다. 거의 모든 이야기 끝에서 볼 수 있는 끝판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순수하고 용기 있는 주인공 '도로시'에게 죽임을 당하는 흔한 역할이다. 작가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그녀에게 주목했다. 그렇게 탄생한 책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나의 놀라움은 작가의 필력이나 탄탄한 전개가 아니었다. 굳이 멀리까지 나서서 파헤치고 끌어모은 발상의 전환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 기발함은 따뜻함으로 변했다. 작가는 진정한 이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에 관한 관심과 사랑이 존재하는 삶의 자세를 가졌다. 아니라면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설명할 수 없다.


초록마녀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흘러간다. 흐름의 개연성이나 독특함은 양념과 같았다. 있으면 좋고 아니어도 심심하니 괜찮은. 주재료 자체가 어디서도 볼 수 없던 매력덩어리라 그저 신기했다. 읽으면서 연신 '그랬구나. 그럴 수 있었겠네.'를 속으로 외쳤다. 마치 내가 도로시가 되어 퇴치한 마녀의 인생을 엿보는 기분이었다. 아마 도로시가 이 책을 읽었다면 나와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내가 한 일을 후회하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의 입장도 이해가 되는 감상이 남는. 작가는 나에게 남을 돌아보는 기회와 여유를 알려주었다. 세상에는 유일한 '나'와 타인이 살아가는 게 아니라고. 모두 각각 다른 '나'들이 모여 지낸다고.


셀 수도 없는 이야기와 함께 살아간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스쳐 지나간다. 그들 각각이 하나의 이야기다. 그 주인공은 모두 다르다. 내겐 그동안 내 이야기만 있었다. 다른 이은 잠깐 나오는 엑스트라일 뿐이었다. 이젠 그들도 각자 자신만의 카메라와 무대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다른 이야기에 대한 인정은 타인에 대한 인정으로 이어졌다. 세상엔 나만 있지 않고 나만 제일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그런 만큼 남도 똑같이 스스로에겐 그렇다. 나에겐 남이 남에겐 나였다.


우리는 혼자서 살아가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나만 바라봐서는 함께 지낼 수 없다. 서로를 이해하려면 다른 쪽의 입장도 둘러봐야 한다. 첫발을 떼는 것이 힘들고 귀찮지만, 의미가 깊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면 내 것에 대한 기대도 접는 게 맞다. 물론 여전히 각자의 우선순위에서 본인을 '최우선 자리' 아래로 내리기는 어렵다. 갑자기 고귀한 성인이 되어 순위를 뒤집는 건 무리다. 우리의 노력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저 아래 '타인'과의 차이를 최대한 줄여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타인을 이해할 필요를 이 책에서 배웠다.



<읽었던 그때 그 순간의 감정과 느낌>

'Wicked' (HARPER / Gregory Maguire) - 20년 4월 완독

힘들게 읽어 내려간 영어 소설. 성인용이라 그런지 어려운 어휘가 많았다. '오즈의 마법사'를 향한 애정과 이해 없이 읽은 프리퀄 작품. 덮고 나서 해설을 찾아보니 원작과의 관계가 흥미로웠다. 원작의 중요하지 않은 인물에 시선을 맞추어 흥미진진하게 풀어가며 서구사회(어쩌면 현대 사회 전체)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뉴욕에서 뮤지컬을 본 아내는 어마어마한 노래 실력의 대단한 작품이었다고. 원작 소설을 읽고 근사한 상상을 풀어낸 작가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읽고 남는 건 받은 질문과 했던 고민뿐

삐딱한 표지 사진 한 장 없는 서평을 고집스럽게 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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