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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Mar 31. 2024

환상과 현실의 경계

<나니아 연대기>

정말 이렇게 끝이야? 


천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을 덮으면서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아쉬움이었다. 아직 뭔가 한창 남았을 거라는 기대와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책을 이리저리 뒤적여 보았지만, 다음은 확실히 없었다. 책에서 눈을 떼고 나서는 옷장으로 눈을 돌렸다. 뽀송뽀송하던 어릴 적엔 눈길도 줘본 적이 없었는데 온몸에 털이 난 이제야 신경이 쓰였다. 그 안에선 별다른 낌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자의 울음소리도, 뿔나팔 소리도, 철썩철썩 파도를 헤쳐 나가는 소리도. 혹시나 했던 마음이 역시나로 변하면서 이미 그쪽으로 넘어가는 때를 놓쳤구나 싶어 마음을 거두었다.


순수한 아이는 어른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본다고 한다. 인형과 장난감이 노는 모습과 풀과 나무가 속삭이는 광경을. 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존재와 함께 지내기도 한다. 새 친구와 듣고 말하고 노는 아이 곁의 어른은 아무것도 눈치챌 수 없지만. 시간과 공간도 초월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고 한다. 커다란 사람에게는 꽉 막힌 곳도 작은 사람에게는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길이 되곤 한다고. 안타깝게도 난 이런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듣기만 했다. 예전엔 그럴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버려 희미해진 게 아니다. 상상을 통해 환상을 가져본 경험이 없다. 지금 내 옆에서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라는 아들을 보면 분명해진다. 나는 저렇게 한계 없는 생각의 나래를 펼쳐본 적이 없다.


보이는 것만 믿고 살았다. 직접 경험하지 않는 일을 구태여 그려보지 않았다. 살에 닿지 않으면 느끼지 않았다. 지금까지 계속. 다른 이의 체험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타인의 해석으로 걸러졌기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을 먼저 한다. 본질은 따로 있고, 부분 중의 부분만 단편적으로 전달된다고 여긴다. 입장에 따른 차이가 전체 내용을 좌지우지하기에 그건 그의 생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이렇게 세상을 받아들이는 내게 보이지 않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에 존재한다면?'이라는 가정도 필요 없었다. 내게 찾아올 때까지는 무의미한 고민이기에.


완벽한 상상으로 철저한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이를 보면 의심스럽다. 정말 생각만으로 이게 가능한가 싶어서. 체험을 통한 게 아니라면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분명 어디론가 넘어가서 보고 듣고 만지고 온 게 아닐까. 내게 없는 공상 능력이 그에게 있다는 인정보다는 더 편한 결론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수없이 들었던 생각이다. 작가는 그곳에 다녀온 게 확실했다. 오랜 시간 같이 지내며 실제로 겪은 모험을 옮긴 것에 불과하다. 이러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이곳과 저곳을 오고 가는 이들에게는 어디가 현실이고 상상일까? 상상하지 못하는 내게 찾아오지 않는 그곳은 확실히 허구다. 하지만 어느 쪽도 경계 없이 연결된 자들에겐 그런 구분이 가능한 걸까.


눈을 감고 코끼리를 어루만지며 짐작하는 것만도 못한 상황이다. 책을 통해 건너 듣는 이야기는 모든 감각을 속 시원하게 채워주지 못한다. 궁금하다. 다른 세계를 어떻게 열 수 있고, 가 볼 수 있는지. 내가 보지 못하지만 남은 볼 수 있다는 상황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아니라면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함이 담긴 스토리를 설명할 수 없다. 확률 높은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딱 한 번의 결과를 기다린다. 어두운 벽장이 되었든 기차역 기둥이 되었든 경계를 늦추지 않겠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라면 내게도 언젠가 올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트릴 순간을 기대한다.



<읽었던 그때 그 순간의 감정과 느낌>

나니아 연대기 (C. S. 루이스/시공주니어) - 20년 6월 완독

결혼하면서 와이프 방에 꽂혀있던 이 책을 언젠가 읽겠다며 신혼집으로 가져왔다. 두툼한 두께 탓에 미루고 미루었다. 반지의 제왕이나 호빗의 원작처럼 지루하고 재미없을 거란 예상도 한몫했다. 어쩐지 표지의 사자가 노려보는 기분이 들어 이사를 할 때마다 챙겼다. 문득 지금이다 싶어서 단숨에 읽었다. 

환상 동화책이라고 부를 수 있다. 흥미롭고 쉽고 재미있는. 전혀 어렵거나 양이 부담이 되는 종류가 아니었다. 1천 페이지 가까운 책을 마치면서 드는 생각은 '이 책이 10권 중의 1권이면 좋겠다'였다. 그만큼 아쉬웠고 다른 이야기를 더욱 읽고 싶어졌다. 어른이 읽어도, 아이가 읽어도 좋을 멋진 책이다. 환상과 모험을 꿈꾸고 싶을 때, 아니면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졌을 때 읽으면 어울릴.

아슬란과 오랫동안 함께한 책을 덮으면서 마치 바로 전까지 곁에 있었던 것처럼 엄숙한 사자의 따뜻한 숨결과 체온이 느껴지는 듯하다. 작가의 상상력과 표현력, 그리고 아이 독자를 위한 세심한 여러 배려에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읽고 남는 건 받은 질문과 했던 고민뿐

삐딱한 표지 사진 한 장 없는 서평을 고집스럽게 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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