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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애넷맘 Feb 15. 2024

고통에 대하여


생애 첫 한라산 등반 때의 일이다. 제주에 가기 전부터 허리가 살짝 아팠는데 짐을 싸고 나르고 공항과 비행기에서 장시간 앉아있으면서 허리 통증이 순식간에 악화되었다. 허리 통증 때문에 고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 터라 남편은 지레 겁을 먹고 당장 약국에 가서 복대를 구매하라고 성화였다. 결국 나는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복대를 구매했고 복대를 두른 채 한라산을 완주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허리 통증이 마치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발목, 종아리와 발바닥 등이 너무 아파서 솔직히 허리의 불편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하산한 이후에도 며칠은 근육통에 시달려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또 어느 시점이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든 통증이 사라졌다.


더 신기한 일도 있다. 친구 P가 유방암 3기로 항암 치료를 받던 시절이다. 오랜만에 점심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는데 머리가 속절없이 빠지기 시작해서 중고거래 앱에서 합리적인 가격에 가발을 구매했다며 쓰고 나왔다. 다소 낯설어 보이긴 했지만 얼굴이 작고 이목구비가 예쁜 친구라 가발이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P의 알레르기 비염이 걱정되어 "요즘 비염은 좀 어때? 아직도 약 먹어야 하나?"하고 물었더니 "아니 비염 완전히 없어졌어."라는 것이 아닌가? 원래 이 친구는 평생 비염으로 고생을 했고 알레르기 시즌에는 아예 약을 달고 사는 데다가 이 때문에 후각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런데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비염 증상이 깜쪽같이 사라졌다고 하니 고통도 더 큰 고통 앞에서는 힘없이 고개를 숙이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고통은 어떻게 그 무게를 측정할 수 있을까? 어디 공식화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저울이나 자로 잴 수도 없으니 말이다. 단번에 순위를 정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단연 현재 내가 느끼는 고통이 가장 고통스럽지 않을까 싶다. 아무리 지난 과거에 구사일생의 고통이 깊다한들 지금 당장 내 오장육부가 불편한 것만큼 시급한 것이 또 있겠는가?


작년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공항 보안 검색대에서 소지품을 챙기다가 왼손 검지손가락을 다쳤다. 긁힌 줄 알았는데 살이 둥글게 폭하고 파여있었다. 출혈도 없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집에 돌아와서 약을 바르고 밴드에이드를 하고 잤다. 살짝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이삼일 지나니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고 딱지가 생기는듯하여 따로 추가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주일쯤 되었을 때부터 더 심하게 욱신거려서 들여다보니 살짝 덧나고 있는 듯 보였다. 다시 약을 바르고 밴드에이드를 붙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라 계속 손에 물을 묻혀서 그런지 쉽게 아물지 않고 점점 통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결국 피부과를 방문했고 의사는 상처 안으로 염증이 깊어진 것 같다며 항생제를 처방해 주었다.


정말 뭐 대단한 상처도 아니고 손가락에 좁쌀만 한 상처 따위가 어찌나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지 설거지할 때마다 왼쪽 검지손가락으로 접시를 받치고 있어야 하는데 아파서 미간이 찌푸려졌다. 머리를 감거나 세수를 할 때도 검지 손가락을 추켜올리고 최대한 닿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써야만 했다. 아니 이게 뭐라고 이렇게 쑤시고 아프단 말인가? 임신과 출산, 모유수유와 잠 못 드는 육아를 네 차례나 경험해서 웬만한 고통은 그럭저럭 잘 참아낼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좁쌀만 하고 실낱같은 상처 따위에 아프다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병원에 가고 항생제까지 먹는 신세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저마다 다르지만 고통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뱃속을 떠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출생의 고통과 공포를 경험하며 세상에 나오니깐. 영화 ‘파더 스튜(FATHER STU), 한국어로는 ‘신부가 된 복서’에서 온갖 역경과 시련을 마주해야 했던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쉬운 삶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어려운 삶을 이겨낼 힘을 달라고 기도하세요."  


가끔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이 평탄하고 순조로운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나는 겸손하게 감사하며 살 수 있었을 텐데.....' 하고 혼자서 소심한 푸념을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직시하는 세상은 금쪽같은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자식 잃은 부모로 살아야 하는 삶이다. 내가 과연 파더 스튜처럼 겸허히 운명을 받아들이고 이처럼 기도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더 강한 인간이 될 수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순탄치 않은 운명에 아픔과 상처, 고뇌를 거듭하며 조금은 더 깊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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