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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애넷맘 Feb 01. 2021

영원한 열세 살

 

좋은 곳에 갔으니, 아픔이 없는 곳에 있으니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천국이 아무리 좋다한들 제 자식을 앞세워 먼저 하늘로 보내고 싶은 부모는 아무도 없다. 아무리 이놈의 세상이 요지경이고 사는 게 지옥 같아도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서둘러 생을 마감하고 싶은 이는 없다. 내게 죽음은 그런 것이다. 이 세상에 괜찮은 죽음은 없다. 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다. 감히 잊으라 말할 수 있는 죽음은 없다.


그리고 죽음보다 더 극단적이고 극적인 소재는 없다.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뽀르뚜가 아저씨의 죽음으로 전 세계의 독자들을 울렸고 만화 "들장미 소녀 캔디"속 안소니는 여우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세상을 떠나면서 캔디뿐 아니라 수많은 소녀들의 영원한 첫사랑으로 남게 되었다.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타이타닉", "러브스토리", "편지" 속 주인공들의 사랑이 가슴 절절하고 더 애절한 것도 다 주인공의 죽음 덕분이다.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감으로 독자 혹은 관객들은 주인공과 함께 절망하고 슬픔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세상의 그 어떤 놀랄만한 이야기들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한없이 가벼워진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 지닌 무게이다.


하지만 실제로 유가족들에게 죽음은 책이나 영화처럼 마냥 감성적일 수만은 없다. 가족의 죽음은 현실이고 당장 결정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눈 앞에 수두룩 널려있기 때문이다. 나도 예외일 수 없었다. 내 아들이 죽었는데, 내 아들은 이 세상에 없는데 나는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어디에 얼마나 돈을 쓸지를 정하고 계산해야 했다. 식당 메뉴를 고르듯이 당장 내 눈 앞에 주어진 옵션들 중 빠른 결정을 해야만 했고 가격을 따져야 했다. 결혼식장 음식 메뉴 고르듯이 장례식장 음식도 골라야 하고 새집 고르듯이 납골당 자리도 정해야 했다. 옵션에 따라서 가격 차이도 만만치 않았지만 비싸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죄스러워 더 눈물이 났다. 꼭 해야 하는 절차라는 것을 알면서도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인간은 차별을 받고 그 격차는 결국 돈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이 너무 허망해서 차라리 어디론가 증발해버리고 싶었다.


장례식장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슬픈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슬프지만 장엄하고 아름다운 씬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단한 곡소리나 울음소리보다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오고 가는 근황 이야기가 도란도란 들리고 중간중간 웃음소리도 섞여 나온다. 금방 자리를 떠나려는 손님에게 한 술 뜨고 가라며 소매춤을 당기며 억지로 앉히고 잠시 후 돌아와 보면 금세 한 공기가 비워져 있다. 그 안에서 아마 가장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던 사람이 나였을지도 모른다. 중간중간 새로운 손님이 올 때마다 리셋하듯이 비슷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고 그러면 눈에서는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자동적으로 눈물이 흘렀지만 사실 대부분의 시간은 얼이 빠져 있었다.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손님맞이에 훨씬 정신이 없었다. 축하 대신 위로를 받고 있었지만 나의 결혼식이나 아이들 돌잔치 때처럼 나는 큰 일을 치르는데 더욱 집중되어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아이를 낳고 쓰러져 있을 때도 그랬다. 정신없이 의사, 간호사, 청소직원, 모유수유 상담사, 사회복지직원 등이 들이닥쳤다. 퇴원을 하고 돌아가서도 쉴 새 없이 모유 수유를 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이 예방주사를 마치고 출생신고를 하러 가고 뭔가 해야 할 일들이 쏟아졌다. 한 사람을 이 세상 일원으로 만드는 일은 참 만만치 않은 일이구나 싶었다. 그냥 쉽게 어쩌다가 일어나는 그런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이 생을 마감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아들을 하늘로 보내며 처음 깨달았다. 충격과 슬픔에서 헤어 나오기는커녕 아직 시작도 못한 것 같은데 해야 할 일들이 연이어졌다.


지난 여름, 만 열세 살에 세상을 떠난 아들은 오는 2월 2일이면 열네 살이 된다. 아들은 떠났지만 그의 생일은 매년 다시 돌아올 것이다. 케이크 위에 나이만큼 초를 꼽는 대신 영정사진 초를 밝히겠지만, 새로운 추억을 만드는 대신 지나간 추억을 기억해야겠지만 특별한 날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몇 해 전 나보다 먼저 일곱 살 딸을 하늘로 보낸 한 엄마가 말했다. 딸이 태어나기 전에 미리 7년 후 딸이 하늘로 떠날 거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도 아이를 낳아서 키웠을 거라고. 헤어짐의 슬픔도 딸이 주었던 사랑보다는 크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열네 살 생일에도 여전히 열세 살인 아들의 생일을 맞이하며 나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보지만 내 대답 역시 한치에 망설임도 없다. 변함없이 아들의 생일을 축복한다.


영원한 열세 살 내 아들아, 생일 축하한다.

내 아들로 태어나 내 아들로 살았던 십삼 년이 내게는 큰 축복이고 기쁨이었단다. 평생 그 축복과 기쁨 잊지 않고 살아갈게. 너는 세상에 남겨진 가족과 친구들에게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숙제를 남겼고 우리가 살아있는 한 너는 늘 우리와 함께 할 거란다.


아들아, 오늘 내가 흘리는 눈물은

너를 향한 그리움이고 사랑이니

엄마를 보며 너무 슬퍼말고 평안하렴.


사랑한다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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