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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 번개…“황홀해 공중에 있는 듯”

[순례노트2-⑥]봉화 청량사 5층석탑과 원효 ‘삼각우송’

by 동욱 Nov 29. 2024

11월 초 청량사 순례는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안동 봉정사를 둘러본 뒤 봉화 쪽으로 가다 ‘소금강’ 청량산 경치에 이끌려 청량사 일주문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오후 4시쯤이었다.      

봉화 청량산 청량사 일주문

일주문에서 청량사 경내까지 923미터, 1442걸음이라고 지도 앱은 안내했고 36분 걸린다고 했다.

그렇게 일주문에 들어섰다. 그리고 10분 정도 걸었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45도 각도의 오르막길을 경사도 100%라고 한단다. 일주문에서 청량사 가는 길은 조금 과장하면 경사도 70%는 훌쩍 넘을 것 같고, 그런 오르막길이 내내 이어진다.

일주문에서 청량사로 가는 막바지 오르막길. 단풍이 곱다

한 언론은 이렇게 표현했다.     


“청량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은 청량사다. 그런데 산문을 지나 올라가는 길의 난도는 대한민국 사찰 중 톱 클래스에 들어갈 정도다. 등산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청량사 오가는 것만으로도 힘들다고 느낄 수 있다. 아래쪽 주차장에는 큼지막하게 차량 통행을 절대 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이곳은 그만큼 지세가 험준하다. 그 중 청량사 올라가는 길은 최고로 가파르다.”<연합뉴스, 2022.9.21.> 

오르막길 끝 모습을 드러내는 청량사 경내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청량사로 향했다. 40분 남짓 걸었을까? 이제는 가쁜 숨을 내려놓아도 되는 지 ‘안심당’이라고 적힌 찻집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니 청량사다.      


5층 석탑과 수백 년은 됐을 소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울긋불긋 봉우리들이 호위무사처럼 에워싸고 있고 그 가운데 석탑이 서 있다.      

봉화 청량사 오층석탑과 삼각우송

“이 절에 오르면 황홀해 공중에 있는 것 같다.”는 고려 문신 박효수의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이 석탑 아래에서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면 모든 게 다 시원하게 풀릴 것만 같다.      


‘청량(淸凉)’    

   

원효대사(617~686)가 금강삼매경론에서 정의한 것처럼 이 절에 오르면 “착하지 않고 흐릿했던 걸 없앴기에 맑고, 삶과 죽음의 깊은 번뇌가 떠나기에 시원한 것일까?”

봉화 청량사 오층석탑

'수행의 장애(不善)의 원인인 침탁(沈濁)을 소멸한 것을 “청(淸)”이라 하고, 생사윤회의 과보인 열뇌(熱惱)를 떠나는 것을 “량(凉)”이라고 한다.' 「滅不善因沈濁故淸. 離生死果熱惱故凉.」
<원효 지음, 김호귀 역, 『금강삼매경론』, 한국학술정보,2010,p.532>     

청량사 삼각우송에서 바라본 오층석탑(출처:봉화군 공식블로그)

석탑과 그 아래의 경치를 감상하고 나면 세 갈래로 뻗은 소나무가 순례객을 반긴다. 이름이 삼각우송(三角牛松). 뿔 세 개를 가진 소를 기리는 소나무란 뜻이다. 원효대사와 삼각뿔 소의 인연을 담고 있다.

      

'원효대사가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청량산 아래 마을에서 뿔이 세 개인 송아지가 태어났다. 큰 덩치에 힘도 강하고 사나워 다루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논을 매던 농부가 소 때문에 쩔쩔매는데 원효대사가 다가가니 온순해 졌다. 원효대사는 감당하기 힘든 소를 시주하라고 했고 농부는 흔쾌히 수락했다.

     

원효대사는 이 소를 데리고 절 짓는 일에 몰두했다. 산 중턱이라 돌과 나무를 옮기는 게 힘들었지만, 워낙 힘이 센 소가 도와줘 절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완공 전날 그만 소가 죽고 말았고 원효 대사는 유리보전 앞에 묻어주었다. 중생들은 뿔 세 개인 소를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여겼고 그 무덤을 ‘삼각우총’이라 불렀다.'  <출처:청량사 홈페이지>

봉화 청량사 삼각우송(출처:경북도청)

세월이 지나 그 곳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자랐는데 가지가 셋으로 갈라져 나왔단다. 봉화군은 청량사 창건 설화를 담고 있는 ‘삼각우송’을 보호수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봉화 청량사 유리보전. 공민왕의 친필 편액이다.

삼각우송 바로 뒤에는 모든 중생의 병을 치료하는 약사여래불을 모신 유리보전이 자리 잡고 있다. 현판 글씨는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한다.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노국공주와 함께 안동 지역으로 내려왔다. 험준한 산악지형인 청량산은 성을 쌓고 방어하기엔 최적의 조건이었다. 중국 원나라 황족이었던 노국공주는 남편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반원정책을 지지했던 정치적 동반자였고, 그들의 러브스토리는 대중문화의 소재가 됐다.

(청량사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응진전에 16나한과 노국공주상이 있다. 해질녘이 돼 가보지는 못했다.)     

봉화 청량사 응진전과 응진전 내 16나한과 노국공주상 (출처:봉화군 공식블로그)

퇴계 이황(1501~1570)은 스스로를 청량산인이라 했고, 청량산을 오가산(吾家山), '우리네 산' 이라 부르며 아꼈다. 김생과 주세붕 등 선조들의 사연도 풍부하다. 경치를 사랑하는 시인 묵객들이 시와 글을 남겼는데, 조선시대에만 100편이 넘는 기행문이 있다고 한다.


그 한 가운데 청량사가 있다.


수려한 풍광에다 흥미로운 사연 덕분에 지금도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가을이면 산사음악회가 열리는 데  ‘수천 명의 인파가 몰린 산중은 인산인해 그 자체’라고 한다.

2019년 청량사 산사음악회 모습(출처:봉화군)

‘천년의 속삭임-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라는 주제로 2001년 처음 시작한 '원조' 산사 음악회.


청량사의 아름다움을 시대 감성으로 풀어내고 ‘세상사에 찌든 방문객의 마음을 달래는 데 부족함이 없다.’


더 많은 이가 찾을 수 있는 도량으로 공들인 청량사 주지 지현 스님은 아래 싯구로 순례객을 반긴다.

봉화 청량사에서 바라본 봉우리와 구름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꽃이 필까 잎이 질까

아무도 모르는 세계의 저쪽

아득한

어느 먼 나라의 눈 소식이라도 들릴까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저녁 연기 가늘게 피어오르는

청량의 산사에 밤이 올까

창호문에 그림자

고요히 어른거릴까

<석지현,『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운주사,2007,p.150>


*주) 글 제목의 배경사진은 불교신문(21.11.4)에서  가져왔다.   

**주) 이 글에서 말한 길 대신에, 주차장에서 900미터 정도 위쪽에 있는 '입석'에서 등산로를 따라 청량사로 가는 숲길을 이용하면 시간은 더 걸리지만 걷기는 상대적으로 수월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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