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노트2-⑦]예산 수덕사와 수덕여관, 사면석불
수덕사는 한국 미술의 거장들과 인연이 깊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즈음. 17살의 장욱진이 수덕사를 찾는다. 성홍열이라는 병에 걸려 요양하기 위해 수덕사의 한 암자에 온 것이다.
불교 집안에서 자란 장욱진은 여섯 달 요양하면서 불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을 것이다. 한국 선불교를 중흥시킨 만공 스님을 직접 뵙기도 했다.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와 함께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장욱진 화백(1917~1990)은 가족, 나무, 새 같은 일상의 소재를 주로 그렸지만, 심우도나 미륵불 같은 불교작품도 많이 남겼다.
인연은 더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1896~1948)을 수덕사에서 만난 것이다.
만공스님께 부탁해 출가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나혜석은 ‘자신보다 잘 그린다’며 어린 장욱진을 칭찬했다고 한다.
나혜석이 1938년부터 1944년까지 주로 생활했던 수덕사 앞 수덕여관. 또 다른 거장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과 인연을 맺는다.
고암은 선배화가인 나혜석이 떠나자 수덕여관을 사들였다. 6.25때를 포함해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살았다.
이응노 화백은 동양화의 전통적 필묵을 활용해 현대적 추상화를 창작했다고 평가받는 거장이다.
1959년 프랑스로 진출한 뒤 동서양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화풍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순례객에겐 이응노 하면 ‘동베를린 사건’이 먼저 떠오른다.
1967년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다. 작곡가 윤이상, 천상병 시인도 연루돼 고문받기도 했다.
2006년 1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위원회는 당시 정부가 국보법과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해 범죄사실을 과장했다고 밝히고,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이 사건으로 이응노 화백은 1년 8개월 동안 수감됐다가 풀려나 1969년 3월 수덕여관으로 돌아온다.
“수덕여관에서 참 오랜만에 한가하게 지냈지. 산책하고 그림 그리고 산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우물 근처 너럭바위에 앉아 넋 놓고 계곡 물소리를 듣는데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바위에 그림을 그리는 거 말이야. 나는 곧 지필묵을 갖추고 바위 옆면을 따라가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
<충북일보,2023.6.8.>
그렇게 바위에 새긴 문자 추상화 2점.
둘레 17m, 높이 85cm와 둘레 7.6m, 높이 75cm의 바위에 글자 같기도 하고 사람 같기도 한 오묘한 암각화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무얼 그린 거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영고성쇠의 모습을 표현했다. 여기에 네 모습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
수덕사 경내로 들어가면 국보 49호 수덕사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과 비교해도 결코 빠지지 않는, 오히려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균형 잡힌 목조건축물이다. 옆면을 보면 간결한 선과 이를 떠받치는 목재들이 기하학적 무늬를 이루며 조화를 뽐내고 있다.
정혜청년과 수덕각시의 설화를 담은 관음바위를 지나 덕숭산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로 돌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좀처럼 만나기 힘든 석불을 마주하게 된다.
하나의 바위인데 네 면에 부처님을 새겨 놓은 ‘사면 석불’이다.
각 면마다 약사불과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미륵불을 조각해 놓았다. 1983년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하나뿐인 사면 석불을 재현해 2008년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면석불의 원형인 보물 794호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의 자료를 찾아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높이 3미터의 돌에 동서남북 사방으로 불상을 조성했다. 부처님 머리 뒤에 새긴 광배는 둥근 모양으로 불꽃처럼, 또 연꽃처럼 보인다. 양식적으로 서산 마애삼존불과 유사해 백제시대의 불상으로 판정했단다.
그런데, 네 분 부처님 모두 얼굴을, 머리를 잃어버렸다. 일부는 손까지 보이지 않는다.
얼굴을 잃은 부처님들이 얼마나 애달팠을까?
2008년 한 거사님의 정성으로 얼굴모양까지 복원해 수덕사 산길에 다시 모신 것이다.
산속 암자인 정혜사로 향하는 오르막 돌계단길을 걷다보면 덕숭산 정상 근처에서 만공탑을 만난다. 이곳까지 이어진 계단의 갯수가 1080개라는 말도 있다.
만공스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47년 건립된 만공탑은 보통의 탑과는 모양이 사뭇 다르다.
‘전통적 승탑 형식을 탈피한 근대적 기념탑이다. 일제강점기 왜색불교를 타파하고 한국불교의 자주성과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한 만공스님의 사상과 불교 교리를 상징적으로 구현해 내고 있고 구성 요소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어 근대기 사찰 조형물로 가치가 높다.’<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왜색불교를 타파하고 한국 선불교를 중흥한 만공스님(1871~1946).
'1937년 3월 11일 조선총독부 회의실.
일제 미나미 총독이 "부패한 조선 불교를 시정하는데 데라우치 전 총독의 공이 크다.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는 합해야 한다"고 말하자 만공스님이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만공스님은 “전 총독 데라우치는 조선 불교를 망친 장본인이다. 마땅히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아야 함이 당연한데 어찌 공이 크다고 하는가.
우리 조선 불교는 1천 5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그 수행 정법과 교화의 방편이 여법하거늘 일본 불교와 합쳐 잘 될 필요가 없으며 총독부에서 간섭 않는 것이 유일한 진흥책”이라며 한국 불교에서 손을 떼라고 일갈했다.' <만공스님 지음, 성각스님 엮음,『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오후에, 2006, pp.128~131>
만공탑에는 ‘세계일화’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만공 스님이 1945년 8월 16일 대한민국 광복 소식을 듣고 무궁화 꽃송이에 먹물을 묻혀 쓴 글씨라고 한다. 그리고 낙관 대신에 무궁화 꽃 ‘근화필(槿花筆)’이라고 쓴 다음 아래 법문을 남겼다고 한다.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니,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머지않아 이 조선이
‘世界一花(세계일화)’의 중심이 될 것이다.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저 미웠던 왜놈들까지도 부처로 봐야
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신동아, 2016.9.21.> ///T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