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노트2-⑧] 안성 칠장사와 박문수 임꺽정
수능 시즌이 되면 칠장사는 더 알록달록해진다.
칠장사 나한전으로 가다보면 작은 다리가 나온다. 빨갛고 파랗고 노랗고 하얗고 초록의 오색 리본이 다리 난간을 완전정복했다.
“원하는 대학 꼭 합격하게 해 주세요”
“가고자 하는 대학 수시 정시 합격”
대학 합격을 기원하거나 준비하는 시험 통과를 바라는 리본이 빼곡하다.
암행어사의 대명사인 어사 박문수가 칠장사 나한전 기운을 받고 장원급제를 했다는 이야기 덕분에 순례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박문수 합격기는 이렇다. 수능 문제의 사전 유출로 의심받을 정황도 있다.
1723년 과거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박문수 선비.
32세 N수생 박문수를 걱정한 어머니가 ‘꼭 칠장사 나한전에 들러 유과를 올리고 기도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박문수는 어머니 말씀대로 불공을 드린 뒤 나한전에서 잠에 들었다.
불공이 통했을까? 그날 밤 꿈에 나한이 나타나 출제 문제와 답안을 알려주는 것 아닌가?
‘에이 이왕 가르쳐 줄 거면 다 알려주지’
나한은 정답 8줄 가운데 7줄만 알려주고 마지막 한 줄은 박문수 네가 알아서 써내라고 했단다.
긴가민가 하는 마음에 수험장에 들어선 박문수 수험생.
꿈에서 알려준 예상문제가 그대로 출제되자 깜짝 놀라면서도 일필휘지! 7줄의 정답에 자신의 능력으로 마지막 한 줄까지 모두 다 채우고 답안을 제출했다.
결과는 장원급제.
좋은 꿈을 꾸고 합격했다는, 이른바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라는 어사 박문수의 합격 수기란다.
입시철이 되면 나한전에서 기도하던 이가 올린 유과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 후기 문신인 박문수(1691~1756)가 1723년에 과거를 보고 합격한 건 맞다. 그런데 장원급제가 아니라 병과(丙科) 16위로 급제해 사관(史官)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관계가 조금 차이나면 어떠랴?
입시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수험생과 가족의 간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고, 또 의지가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박문수 수험생이 하룻밤 묵었다는 나한전.
그 때 그 모습은 아니겠지만 부처님을 중앙에 두고 일곱 명의 나한이 빙 둘러 자리를 잡고 있다. 16나한이나 500나한이 아닌 왜 일곱 나한이지?
여기에도 재미있는 스토리가 숨어 있다.
고려 9대 덕종의 스승이었던 혜소 국사(慧昭國師, 972~1054)가 칠장사에 올 때 이야기라고 한다.
7인조 도적이 새로 온 스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고 절을 차례로 정탐했다.
하루는 한 도둑이 절 우물가를 찾았는데, 금으로 된 바가지가 있었다. 물을 마시고는 금 바가지를 훔쳐 비밀장소에 숨겼다. 다음날 다른 도둑이 가니 또 금 바가지가 있었다. 또 훔쳐 숨겼다.
그런데 일곱 명이 갈 때마다 금 바가지가 있는 게 아닌가?
이상하게 여긴 7인조 도적. 훔친 금 바가지가 잘 있는지 비밀장소에 가보니 금 바가지는 온 데 간 데 없고 평범한 표주박만 있지 않은가?
혜소국사가 신통력을 부린 것이라는 걸 알고는 스님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부처님의 제자가 됐다고 한다.
혜소국사의 가르침이 뛰어난 걸까? 나한전 터가 좋은 걸까? 이들 도적 모두는 수행 끝에 나한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줄임말로, 번뇌를 끊고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 성자를 말한다. 불법을 지키고 대중을 구제하는 임무도 맡고 있다.
도적 7인이 나한의 경지까지 올랐으니 그들의 학구열과 노력은 물론, 혜소국사의 법력 또한 대단했던 것 같다.
일곱 나한은 박문수를 합격시킬 정도로 신통력을 부렸으니 칠장사는 이래저래 공부에 관한 기도처로서 어디에도 빠지지 않을 듯싶다.
비슷한 사연은 500년 뒤 조선 명종때 반복된다. 병해대사, 이른바 갖바치 스님과 의적 임꺽정 이야기다.
“예부터 서도에 큰 도둑이 많았다. 명종 때는 임꺽정이 가장 큰 괴수였다. 임꺽정은 본디 양주 백성인데, 경기로부터 황해도에 이르기까지 연도(沿道)의 아전들이 모두 그와 밀통돼 있어 관가에서 잡으려 하면 그 기밀이 먼저 누설됐다.
…이에 남치근으로 토포사를 삼아 재령에 주둔시키자 적도가 구월산으로 들어가 대항하였다.…군마를 집결시켜 산 아래를 철통같이 포위시키니 적의 참모 서림이 항복하고…소탕전 도중에 임꺽정이 민가로 숨었다가 다시 관군으로 위장해 도주하려다 사로잡히게 되었다.…
3년 동안(1559년~1562년) 몇 도의 군사를 동원해 겨우 도둑 하나를 잡았고 양민으로 죽은 자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이익 지음 , 고정일 번역,『성호사설』,동서문화사,2015,p.474~475>
‘겨우 도둑 하나’라고 표현했지만 아전들까지 임꺽정과 소통했다는 걸 보면 당시 정치적 혼란과 부정부패로 민심이 정부를 떠났음을 알 수 있다.
임꺽정은 민중을 대변하는 저항의 아이콘인 셈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임꺽정을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도적으로 꼽았다.
백정 출신인 임꺽정의 스승은 갖바치인 병해 대사다
“그 사람이 초년에는 함흥 고리백정이요, 중년에는 동소문 안 갖바치요, 말년에는 칠장사 백정중이라 천인(賤人)으로 일생을 마쳤으나...백정중으로는 승속간(僧俗間)에 생불(生佛)대접을 받았었다”
<벽초 홍명희,1991>
임꺽정이 안성 관아에 붙잡힌 동료를 구하려고 내려왔다가 스승을 뵙기 위해 이봉학이, 박유복이 등과 함께 칠장사를 찾았다.
하지만 스님은 이미 입적한 뒤였다.
이들은 스님의 영전에서 의형제를 맺었고, 스님이 목불을 조성하려고 보관한 나무에, 무명 몇 필을 주고 불상을 깎게 했다.
“현감의 아들 병이 공교히 새 불상에 불공드리던 날부터 낫기 시작하여 며칠 후에 씻은 듯 부신 듯 다 나았다. 칠장사 새 부처님의 영검스러운 소문이 더욱 높아져 병 있는 사람은 병 낫게 해달라고 불공을 드리고 자손 없는 사람은 손 보게 해달라고 불공을 드려서 한참 당시에는 일년 삼백육심오일에 불공 안 드는 날이 며칠이 안 되었다. 이 영검스러운 부처가 별명이 백정부처니 백정부처는 지금까지 칠장사에 남아 있다.
백정부처의 몸에 칼자국이 있는데, 중들의 전설을 들으면 어느 때 술취한 양반 한 분이 백정부처를 와서 보고 '백정놈의 부처가 어디 있단 말이냐'하고 칼로 찍고 곧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벽초 홍명희,『林巨正⑥-의형제편 3』,사계절, 1991, p.293>
칠장사 극락전에 모신 꺽정불이라는 부처님이다.
바닥면에는 봉안임거정(奉安林巨正)이라고 적힌 삼베가 붙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2008년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나왔다.
충북대 목재문화연구소가 방사선으로 삼베 조각 등의 연대를 측정해 보니 “1540년을 중간연대로 ±100년”이라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실제 임꺽정(?~1562)의 활동 시기와 비슷해서 임꺽정이 이 불상을 봉안했을 게 확실해 지는 것이다. <출처:칠장사 홈페이지> ///T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