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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유억불시대’ 문명 충돌의 현장

[순례노트2-➈]양주 회암사지와 사리 ‘환지본처’

by 동욱 Dec 20. 2024

양주 천보산 회암사는 현재 있는 절보다 불에 타 사라진 절이 더 유명하다.      


회암사 옛 터를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절이라기보다는 잘 정리되고 구획된 궁궐터처럼 보인다.    

양주 회암사지 전경양주 회암사지 전경

회암사지 절터의 넓이는 3만 3천㎡(1만여 평), 고승의 부도가 있는 지역까지 확대하면 32만 3천㎡(약 10만평)이다. 경복궁 궁궐 영역이 26만 4천㎡(약 8만평)이고 경복궁 총면적이 43만 9천㎡ (13만여 평)이니 회암사지의 규모를 비교 짐작할 수 있다.  


1997년부터 2019년까지 13차례 발굴조사에선 궁궐 건축 요소가 두루 발견됐다. 왕실에서만 사용하던 청기와, 용과 봉황무늬가 새겨진 막새기와 등 유물 수십 만 점도 나왔다. 절이지만 임금의 별장 혹은 행궁으로 사용된 흔적이다.     

양주 회암사지 전경 일부양주 회암사지 전경 일부

고려 말 지공선사(?∼1363)와 나옹선사(1320~1376), 그리고 여말선초 무학대사(1327~1405)로 계보가 이어지는 회암사.      


무학대사가 조선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태조 이성계의 스승인 왕사(王師)가 되고, 회암사는 조선 초 주요 사건에서 빠질 수 없는 역사적 장소가 된다.     

양주 회암사 조사전에 있는 무학대사 진영양주 회암사 조사전에 있는 무학대사 진영

1398년인 태조 7년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이복동생을 죽이자 이성계는 왕위를 넘기고 고향 함흥으로 사라진다. 2년 뒤 정종에 이어 태종이 된 이방원은 차사를 보내지만 말 그대로 함흥차사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무학대사. 태종의 부탁으로 태조 이성계를 설득해 모신 곳이 회암사라고 한다.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탑(보물 388호)와 쌍사자 석등(보물 389호)양주 회암사 무학대사탑(보물 388호)와 쌍사자 석등(보물 389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에피소드도 회암사가 무대다.  


양녕이 폐위되고 충령이 세자가 되자 효령대군은 불교에 귀의해 회암사에 머물렀는데…,      


“처음에,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불사(佛事)를 짓는데, 양녕대군이 사냥해 잡은 새와 짐승을 절 안에서 구었다. 효령이 ‘불공(佛供)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소’ 하니, 양녕이 말하기를,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또한 불자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하니 효령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初, 孝寧大君作佛事于檜巖寺, 讓寧大君亦往畋于野, 燔煮所獲禽獸于寺中, 孝寧曰: "今當供佛, 不宜如此. "讓寧曰: "我則生爲國王之兄, 享有富貴, 死亦爲佛者之兄, 誕登菩提, 不亦樂乎?" 孝寧無以對.)

<세종실록 112권, 세종 28년(1446년) 4월 23일 경신 3번째 기사,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불사를 짓다」,『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804023_003 >     


왕조의 창업주와 왕의 스승, 왕의 형이 머무르던 회암사. 조선 초기 왕실의 보호와 후원 아래 융성하는, 속된 말로 매우 잘 나가는 왕실 사찰임에 분명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5

“1464년 4월 효령대군이 회암사 동쪽 언덕에 석종을 세워 석가여래의 사리를 안치하고 법회를 열자, 석가여래가 공중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사리가 분신해 수백여 개가 되는 등의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여기서 석종은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으로 현재 건립 위치와 일치하고 있다. 또 발굴조사와 많은 학자의 연구를 통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던 탑으로 파악되고 있다.


더불어 탑에 새겨진 용, 기린 등 뛰어난 조각과 치석수법은 조선 전기 왕실발원 석조물과 친연성(親緣性)을 보이고 있으며, 조선시대 일반적인 불탑과 차별되는 형태를 가진 새로운 불탑 양식의 대표적인 사례로 파악되고 있다.” <출처: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홈페이지>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출처:양주회암사지 박물관 홈페이지)양주 회암사지 사리탑(출처:양주회암사지 박물관 홈페이지)

하지만 왕실 권위에 너무 취했을까? 아니면 숭유억불시대 유교의 반격일까?

    

조선왕조실록엔 회암사의 부패를 고발하는 유생의 글이 잇따라 올라온다. 세종실록에 실린 기사 제목을 일부만 인용한다.


‘성균 생원 방운 등이 회암사의 대대적인 수리와 아울러 불교의 폐단에 대하여 상소하다.’

‘회암사 중의 간음·절도 사건을 기화로 절의 노비 폐지를 청하게 하다’   

양주 회암사지와 사리탑양주 회암사지와 사리탑

왕실의 불교 수호와 유학자의 반발은 회암사를 중심으로 조선 중기까지 이어지는 데, 12살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1501~1565)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대결은 정점에 달한다.   


문정왕후가 보우대사를 왕사로 모신 뒤 회암사에서 대법회를 열고 불교중흥을 선포하고자 했다. 하지만 법회를 사흘 앞두고 문정왕후가 갑자기 숨지자 유학자들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보우대사는 '조정과 유생이 잇달아 처벌을 주청해 제주에 유배된 뒤 제주 목사 변협에게 주살당했고'<명종실록 32권, 명종 21년(1566년) 4월 20일 신사 2번째기사>, 불교 중흥책은 뒤집혔으며 회암사는 말 그대로 풍전등화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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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을 들으니 여항(閭巷)에서 떠들썩하게 전파되기를, 회암사를 태우려고 한다 하여, 듣기에 매우 놀랍다. 식견(識見)이 있는 진정한 유자라면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명종실록 32권, 명종 21년(1566년) 4월 20일>


누구의 소행인지 언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으나 결국 회암사는 불에 타 사라지는 운명에 처했다. 선조실록에는 회암사가 소실됐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한다.     


“회암사 옛 터에 큰 종이 있는데 또한 불에 탔으니”
 <선조실록 64권, 선조 28년(1595년) 6월 4일>     

회암사지 위쪽에 자리한 현 회암사의 대웅전회암사지 위쪽에 자리한 현 회암사의 대웅전

숭유억불시대, 불교와 유교 '문명 충돌의 격렬한 현장'이었던 회암사는 이후 몇 차례 중건 시도가 있었으나 결국 폐사지라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현재의 회암사는 1920년대 작은 암자로 명맥을 이어오다 1977년 호선대사가 법당을 지어 조성했다고 한다)


그런 회암사에 일제 강점기 때 유출됐던 부처님 사리가 다시 돌아온 건 무슨 조화일까?     


2024년 4월 미국 보스턴에 있던 부처님 사리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른바 환지본처(還至本處).

대중에 공개된 3여래 2조사 진신사리 (출처:불교신문)대중에 공개된 3여래 2조사 진신사리 (출처:불교신문)

돌아온 사리는 가섭불, 정광불, 석가불, 지공선사, 나옹선사 등의 사리로 모두 5과다.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한 진신 사리와 사리구의 반환논의는 2004년부터 시작됐는데, 20년이 지난 2024년 2월 미국측과 협상을 마무리했다.


“불법의 상징인 사리는 원래 봉안되었던 청정도량 양주 회암사로 돌아가 여법하게 봉안될 것이며 사부대중은 사리를 예경하고 숭앙해 부처님이 설하시고 역대 조사가 전하신 불법의 등촉(燈燭)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불교계는 기대한다.<불교신문,2024.4.19.>     

대중에게 공개된 석가모니 진신사리(출처:조계종·서울신문)대중에게 공개된 석가모니 진신사리(출처:조계종·서울신문)

왕실의 보호아래 융성했다가 불에 타 소실된 회암사


고려말 회암사를 중창한 나옹선사의 애송시가 문명 충돌과 같은 격동의 시기를 지나 온 회암사와 묘한 대척점을 이룬다.

현재의 양주 회암사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현재의 양주 회암사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垢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聊無愛而無憎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而終我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垢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聊無怒而無惜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而終我  <출처:회암사 홈페이지> ///T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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