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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텅 빌 때 까지”…‘세 자매’ 지장보살

[순례노트2-④]고창 선운사와 참당암,도솔암

by 동욱 Nov 15. 2024

“침묵이 최선의 방어라고 생각하는 피고의 쓰지 않는 혓바닥을 먼저 뽑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신과함께-죄와 벌」(2017) 에서 거짓 지옥을 관장하는 태산대왕의 대사 한토막이다. 살았을 때 저지른 거짓에 대한 반성은커녕 인정조차 않는 태도를 문제 삼은 것이다.     


천륜지옥을 담당하는 염라대왕은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며  “살아서 못한 효도를 죽어서 할 수 있겠냐”고 불효자를 꾸짖는다.


불교가 묘사하는 지옥은 전문 관료체계 같다. 나태와 불의, 폭력, 살인, 배신, 천륜 등 각 분야의 책임자 격인 열 명의 대왕이 이승을 떠난 이를 평가하고 처벌을 내리는 구조다. 형벌도 구체적이다. 쇠몽둥이에 맞고, 칼에 찔리고, 펄펄 끓는 쇳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가혹한 형벌이 무한 반복된다.     


그 지옥을 고대 인도의 최상계급인 바라문의 딸이 어머니를 찾기 위해 제 발로 찾아간다. 그리고 공덕과 효심으로 어머니를 구해낸다.      


그런데 지옥의 참상을 직접 본 그는 아주 큰 다짐을 한다.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게 깨달음의 완성이니, 지옥이 다 텅 빌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

(衆生度盡 方證菩提 地獄未空 誓不成佛)    

고창 선운사 지장보궁고창 선운사 지장보궁

지장보살이다.      


염라대왕 같은 열 명의 왕을 거느리고 저승세계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존재로, 불교의 사후세계와 구원의 메시지를 품고 있다.      


고창 선운사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시는 대표적인 지장 도량으로 손꼽힌다.

고창 선운사 지장보전 내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279호)고창 선운사 지장보전 내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279호)

선운사 지장보궁에는 지옥세계를 관장하는 금동지장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일제 강점기 때 영험담으로 유명하다.     


1936년 도난당해 일본으로 가게 됐는데, 불상을 소유한 사람 꿈에 지장보살이 나타나 “도솔산 선운사로 보내달라”고 했다는 거다. 이를 무시하자 병이 들고, 가세가 기울어 다른 이에게 처분했다고 한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도 같은 현상이 반복되자 마지막 불상 소유자가 경찰에 신고해 결국 1938년에 선운사로 돌아오게 됐다고 한다.      

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 설명판고창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 설명판

그런데 선운사에 모셔진 지장보살이 모두 세 분이라고??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세 분의 지장보살, 이른바 ‘삼장보살’이 계신 곳이 선운사라고 한다.     


지장보궁의 불상이 고통 받는 지옥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라면, 참당암과 도솔암에 모신 지장보살은 병든 중생을 살피고 천상의 무리에게 설법을 하는 보살이라는 것이다.     


내친 김에 선운사 참당암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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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사 참당암 가는 길과 참당암 전경

걸어서 40~50분가량 걸리는 숲길을 따라가면 암자라기에는 조금 규모가 있는 참당암이 나온다.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는 법당이란다. 이곳의 지장보살은 어떻게 생겼을까 호기심에 지장전으로 향했다.

선운사 참당암 지장전과 석조지장보살좌상선운사 참당암 지장전과 석조지장보살좌상

돌로 만든 석조지장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머리에 두건을 두른 모습과 형상은 선운사의 지장보살과 비슷해 보이는데, 돌로 만든 지장보살은 흔치 않다고 한다. 손에는 여의주를 들고 있는데, 현실의 삶이 힘겨운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려는 것 같다.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보물 2031호)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보물 2031호)

그런데 지장보살은 지옥세계를 관장하는 분인데 현실에도 관여하는 것일까?      


“석가모니는 (자신이 입적한 후) 미륵불이 올 때까지 지장보살에게 중생 책임을 당부한다. 그 어떤 보살도 하지 못했던 서원과 능력을 인정하는 석가모니와의 관계설정이야말로 지장보살의 위신력이 증명되는 순간이다.…특히 지장보살은 육도를 두루 다니며 천인에서부터 지옥중생을 구제하는 사상을 띠고 있다. 육도 중에 인간도 포함되어 있으니 살아있는 사람들의 현세구복까지 맡고 있으므로 지장보살의  활동 범위가 그 어느 보살도 비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경란,「한국지장신앙의 변천사 연구」, 부경대 박사논문,2021.pp.35~37>     

고창 선운사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 설명판고창 선운사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 설명판

그래서 참당암의 보살은 현실세계를 담당하는 지지보살(持地菩薩)로 불리기도 한단다.      


돌로 만든 두 번째 지장보살을 뒤로하고 세 번째 지장보살을 보기 위해 도솔암으로 향했다. 


참당암에서 걸어서 40~50분 정도 걸린 듯하다. 등산이라기보다는 숲길을 걷는 산책 같은 느낌이라서 그렇게 힘이 들지는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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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참당암에서 도솔암 가는 숲길

다만 도솔암에서 지장보살이 위치한 ‘도솔천 내원궁’으로 가는 마지막 길은 계단으로 이뤄져 있다. 자신을 참회하는 108계단에 이어 선지식을 찾는 53계단으로 구성돼 있다는 그럴 듯한 설명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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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천 내원궁 현판과 올라가는 계단

아무튼 꽤 많은 계단을 올라가면 ‘도솔천 내원궁’이 나오고 그곳에서 금동지장보살좌상을 만날 수 있다. 하늘에 있다는 의미로 천장보살(天藏菩薩)로도 불린다.


생김새는 앞선 두 지장보살과 비슷하다. 머리에는 두건을 감고 있고 목걸이 장식등도 꽤 닮아 보인다. 왼손에 수레바퀴를 들고 있는 게 특징이다. 이 ‘법륜’은 언제 어디서나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280호)선운사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280호)

여기서 또 다른 호기심이 생긴다.


원래 도솔천 내원궁은 미륵부처가 거주하면서 천인들에게 설법을 하는 곳인데, 왜 지장보살이 계시지? 마치 안주인이 바깥양반을 딴 곳으로 보내고 안방을 차지한 것 아닌가 하는 세속적인 상상이 꼬리를 문다.     

브런치 글 이미지 14

석가모니 부처의 부탁으로 미륵불이 올 때까지 56억년이라는 무궁무진한 시간동안 중생을 구제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지장보살.


그런데 미륵부처가 바로 옆에서 중생 구제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면 지장보살은 내원궁에 앉아 지옥과 인간 세계를 바꿀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해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북돋운 건 도솔천 내원궁 옆 왼편 암벽 칠송대(七松臺)에 신체 높이 15.7m, 무릎 너비 약 8.5m의 거대한 마애불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보물1200호)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보물1200호)

이름은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흔히 도솔암 미륵불로 불린다.     


이 불상의 배꼽에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는데, 동학농민전쟁 때인 1892년 동학 접주 손화중이 이 비결을 꺼냈다는 소문이 돌았다.(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민중 사이에 회자되는 구세주 미륵불 신앙에다 비결까지 넣었다는 뉴스까지 퍼졌으니,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은 곧 농민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을 것이다.  

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비결이 들어 있다던 배꼽부분이 또렷하다선운사 동불암지 마애여래좌상. 비결이 들어 있다던 배꼽부분이 또렷하다

결국 도솔암이라는 공간에 미륵불과 지장보살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등장한 건 중생 구제라는 임무를 띤 “미륵신앙과 지장신앙의 결합에서 각 보살의 역할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구조라고 생각한다.”<이경란,2021>


동백과 백파율사비로 유명한 선운사. 천상과 지상, 지하 세계의 천도를 담당하는 세 분의 지장보살이 탱화가 아닌 불상의 형태로 온전하게 봉안된 사찰이라는 점도 기억하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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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삼장보살. 지장보살(좌) 지지보살(중) 천장보살(우)

지옥, 지상, 천상이라는 개념을 ‘과거 잘못을 빌고, 현재의 복을 빌고, 그리고 미래의 희망을 비는’ 것으로 풀이하면서 세 분의 지장보살에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선운사 지장보살을 본 뒤 참당암을 거쳐 도솔암까지, 삼장보살(三藏菩薩)을 살펴보는 한나절의 산행도 괜찮은 여정으로 보인다.  ///T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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