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노트2-③] 서울 진관사 수륙재와 백초월 태극기
1939년 10월 14일 서울 용산역.
만주 봉천행 화물열차에 커다란 글씨가 그려진다.
‘대한독립만세’
중일전쟁이 치열하던 당시 서울 용산역은 평양, 신의주를 지나 만주 봉천과 하얼빈 등지로 군인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일제의 보급 전초기지였다.
그 곳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격문’이 새겨진 것이다.
1980년대 뉴욕 지하철의 ‘그라피티 운동’이 떠올랐지만 ‘용산역 낙서사건’은 단순한 ‘그라피티’ 이상의 의미였던 것 같다.
일제가 체포한 승려만 70명이 넘고, 글씨를 쓴 박수남을 비롯해 3명은 혹독한 고문 탓에 사망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 백초월(1878~1944) 스님이다.
1920년 제2의 3.1운동을 기획하다 붙잡혀 일제의 고문으로 ‘반미치광이’가 된 백초월 스님.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과 전달, 청년 독립투사의 육성 등 치열한 독립투쟁을 전개한 분이다.
‘용산역 낙서사건’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국내와 해외 단체가 서로 소통하는 일종의 ‘독립’암호문이었고 일제가 그 의미를 파내려고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는 증언도 채록됐다.<김광식, 「백초월의 항일운동과 진관사」,『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6집, 2010. p.49>
“밤하늘의 별은 총총한데 우리나라는 언제 독립을 되찾을 수 있을까?”라며 중얼거렸다는 백초월 스님
<연합뉴스.2009.8.11>
진관사에 머무르며 조국 독립을 염원했던 초월 스님의 영웅적 삶은 그러나 1944년 청주 교도소에서 순국하면서 영원히 역사 속에 묻힐 뻔했다.
백초월의 삶을 세상에 온전히 드러낸 건 그의 독립의지를 담은 태극기 덕분이었다.
2009년 5월 26일 진관사 칠성각. 해체복원 작업 중 나온 낡은 보따리에서 귀중한 보물이 발견됐다.
가로 89㎝, 세로 70㎝, 태극의 직경은 32㎝. 일장기 위에 태극무늬를 덧댄 태극기였다.
1919년 6월 6일부터 12월 25일까지 발행된 독립신문과 독립운동 연구에 보탬이 될 귀중한 사료도 함께 나왔다. 특히 1919년 11월 27일 발행된 독립신문 1면에는 ‘태극기’라는 시가 실려 있었다.
「三角山(삼각산) 마루에 새벽빗 비쵤제
네 보앗냐 보아 그리던 太極旗(태극기)를
네가 보앗나냐 죽온 줄 알앗던
우리 太極旗(태극기)를 오늘 다시 보앗네
自由(자유)의 바람에 太極旗(태극기) 날니네
二千萬 同胞(이천만 동포)야 萬歲(만세)를 불러라
다시산 太極旗(태극기)를 爲(위)해 萬歲萬歲(만세만세)
다시산 大韓國(대한국)」<독립신문,1919.11.27>
90년 세월을 지닌 물건의 주인은 누구이고, 왜 이곳에 있었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계호스님과 법해스님 등 진관사 스님들과 학계 권위자들이 나섰고 결국 백초월 스님의 구체적인 행적을 밝혀낸 것이다.
특히 1919년 태어나 유년시절을 진관사에서 보낸 금봉스님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금봉스님 기억 속에 ‘항일운동가 백초월’에 대한 기억이 선명히 남아 있었던 거죠.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던 것, 일제 감시를 피하려고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던 것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어요. 하루는 초월스님과 함께 진관사 경내를 걷는데 초월스님이 대웅전 뒤 북한산(삼각산) 응봉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대요.
‘삼각산이 조선이면 왜놈은 달걀이야. 달걀로 삼각산을 아무리 쳐도 삼각산은 끄떡없지’라고요. 그 간절한 마음으로 숨겨두신 태극기를 우리가 이제야 찾았다며, 금봉스님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신동아,「속속 밝혀지는 진관사 태극기의 비밀」, 2019년 3월호>
백초월 스님은 지금은 복된 곳에서 기쁨을 누리고 계실까?
삼일절과 광복절이 되면 진관사가 있는 서울 은평구와 백초월 스님의 고향 경남 고성에선 ‘진관사 태극기’를 거리에 게양하며 그의 독립의지를 기리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옥중에서 순국한 그의 마지막 육신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진관사는 해마다 9~10월이면 하늘과 땅의 생명, 죽은 이와 산 자를 가리지 않는 모든 존재의 평안과 행복, 극락왕생을 비는 수륙재를 봉행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지내주지 못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니 매우 가련하도다. 이에 옛 절에 수륙도량을 마련하고 해마다 재를 베풀어서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도 복되게 하라.” <권근,「진관사수륙재조성기」,조선초. (출처: 진관사 홈페이지)>
조선 건국 이후 1397년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시작된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49일 동안 이어지는 데, “불교의 중생구제와 한국의 문화를 대표해 세계에 알리는 불교의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진관사 스님들과 신도 대중들이 다함께 큰 연을 들고 진관사 일주문 밖으로 나가 영가(돌아가신 분들의 넋)를 맞이하는 의식인 시련(侍輦)을 시작으로 괘불이운, 영산작법, 수륙연기, 회향봉송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특히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던 영산회상이 재현돼, 어산 범패 스님들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천상의 음악과 무용을 환희롭게 펼친다.’
모든 영혼을 배웅하고 단에 올렸던 위패 등을 태우는 봉송회향을 마지막으로 수륙재는 끝나게 되는데,
“우주법계와 저승과 이승의 모든 생명에게 두루 미치는 환희롭고 장엄한 법식을 베풀어, 죽은 이는 극락왕생하게 되고, 살아있는 이들은 업장이 소멸돼 무한한 이익과 행복을 누리게 되는 최고의 수행, 발심, 공덕의 불교의례”라고 진관사는 설명하고 있다.
진관사 수륙재는 2013년에 국가무형문화재 126호로 지정됐다.
조선 태조 때부터 수륙재 근본 도량인 진관사를 백초월 스님이 활동 근거로 삼았다는 게 우연만은 아닐 거라고 짐작해 본다.
불교의 맛, 한국의 맛으로 세계인의 미각을 사로잡은 진관사. 세계 유명인사들이 그 맛을 알기위해 한국에 오면 이 곳을 꼭 찾고, 세계 톱클래스 셰프들도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오는 곳.
백초월이라는 독립운동의 전설적 영웅과 수륙재라는 우리 불교 전통의 장엄한 의식까지 더해져 그 멋과 깊이가 한층 더 두터워진다. ///T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