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노트2-⑫]강화 전등사와 삼랑성
강화 전등사로 가는 길에는 일주문이 없다.
대신 우리 생활에서 매우 자주 사용하지만 사찰에서는 희귀하고 생소한, 남문과 동문이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 올라가 ‘남문’ 앞에 섰다. 순례자를 반기는 성곽이 있고 그 위에 누각은 번듯하다.
종해루(宗海樓).
모든 강물이 합쳐지기에 바다가 최고 우두머리라는 뜻일까? 영조 15년인 1739년에 세워졌고, 1976년에 다시 복원했다고 한다. 으뜸인 바다를 바라보는 누각아래 길게 성곽이 이어져 있다.
세 발 달린 가마솥 모습의 산, 정족산에 있어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지만, 단군의 세 아들 부여, 부우, 부수가 쌓은 ‘삼랑성(三郞城)’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다. 국가사적 130호다. (단군과 관련된 유이(?)한 유적이라고 한다. 다른 한 곳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강화 참성단이다.)
삼랑성 남문을 지나 전등사쪽으로 올라가니 700년과 35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조선 후기 관아에서 열매 수확량의 두 배를 공물로 내라고 했다는 동자승의 전갈에 노승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도력 높은 스님에게 기도를 부탁했더니, 아예 열매가 맺히지 않게 만들었단다. 재미있는 사연을 품은 노승 나무와 동자승 나무다.
전등사 대웅보전으로 다가가는 데 대웅보전 안내판 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건물 네 모서리 추녀 밑에는 벌거벗은 사람의 모습을 조각했다.’ 일명 나부상(裸婦像).
실제로 대웅보전 추녀 아래에는 두 손으로 지붕을 떠받친 2개의 조각상과 왼손으로 떠받치는 조각상, 오른손으로 떠받치는 조각상, 이렇게 모두 4개의 조각상이 네 귀퉁이에 있다.
60cm 크기의 조각상을 왜 만들었을까? 안내판의 다음 문장이다.
“전설에 따르면 절을 짓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막 여인의 모습이라고 한다. 나쁜 짓을 꾸짖어 하루 세 번 부처님 말씀을 들으며 죄를 씻고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의미로 추녀 밑에 새겨 추녀를 받치게 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부처님을 모셔야 하는 대웅보전인데, 굳이 벌거벗은 여인네를 새겨 넣어야 했을까?
의구심이 풀리지 않아 전등사 홈페이지를 더 찾아봤다.
‘17세기 말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던 도편수가, 사랑을 배신하고 돈만 챙긴 주막 주모를 응징하기 위해 조각해 넣었다’는 전설을 비중 있게 전하고 있는 건 맞다.
그런데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의 하나인 야차 혹은 나찰’이라는 의견에서 ‘부처님 전생에 등장하는 원숭이’라는 해석까지 여러 학설이 나오고 있다며 여지를 둔다.
불법의 수호신인 야차나 나찰로 보기엔 조각상이 초라하고 위엄도 없어 보인다. 오히려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원숭이라는 해석에 더 끌린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국왕, 신하 같은 귀한 신분도 거쳤지만 도둑은 물론 코끼리, 원숭이, 물고기 등 동물로도 많은 전생을 거쳐 수행한 걸로 나와 있다. 고대 불교의 설화집인 자타카 혹은 본생담(本生譚) 내용이다.
몽키 킹이었던 부처님의 전생 공덕은 이렇다.
“8만의 원숭이와 원숭이왕이 히말라야 설산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바라나시의 왕이 그 곳을 여행하다 진귀한 과일의 맛을 보게 됐다. 망고였다. 일대를 뒤져 망고나무를 찾은 왕은 뛰어난 맛과 향을 즐기고 나무 아래에 누웠다. 그런데 원숭이 떼가 망고 나무 위에서 망고를 먹고 있는 게 아닌가? 화가 난 왕은 원숭이 떼를 포위하고 죽이라고 했다.
그 순간 원숭이왕이 나타나 자신의 몸으로 다리를 만들어 등을 밟고 달아나도록 했다. 8만의 원숭이가 몸을 밟고 건너갔으나 원숭이왕은 허리가 끊기고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다. 두려움에 괴로워하는 백성 원숭이를 위한 원숭이왕의 희생에 감동한 바라나시의 왕은 장례를 성대히 치르고 사당을 세워 일생동안 향과 화환을 바쳤다. 또 원숭이왕의 교훈에 따라 보시 등 선행을 하고 정의로 나라를 다스려 천상에 태어날 몸이 되었다.
그때의 바라나시의 왕이 아난다(석가모니 10대 제자 가운데 한 명)이고, 8만의 원숭이들은 부처님의 권속이며, 원숭이왕은 부처님이었다.”<각전,『자타카로 읽은 불교1』,민족사,2023,pp.37~42>
목숨을 바쳐 자신의 원숭이 무리를 구하고, 수많은 중생도 구원한 석가모니 부처님을 위하는 마음에 원숭이들이 대웅보전을 떠받들고 있는 걸로 해석하면 마음이 푸근해 진다.
“이 원숭이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끝없는 공경을 나타내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전등사 대웅보전 귀공포 연꽃무늬 소로위에 지붕을 받들고 있는 원숭이 모습은 가히 일품이고,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를 전각에 새긴 도편수의 창의성은 가히 최고이다.”<불교신문, 2021. 11. 24>
옛 왕이자 중생구제의 슈퍼스타에 대한 원숭이들의 공경이 온 하늘에 널리 퍼진걸까?
대웅보전 안에는 꽃을 물고 날아와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새들로 북적인다.
원숭이 왕 스토리를 뒤로 하고 삼랑성 동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무지개다리 형태의 동문이 좌우 성곽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해발 222m인 정족산 정상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약 2.3km 이어진 성곽은 전등사를 에워싸는 형세다.
성곽 곳곳에는 몸을 숨겨 적을 감시하거나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돌출된 치성(雉城)이 만들어져 있다.
흙으로 쌓은 뒤 돌을 깨어 곳곳을 채운 산성. 이 곳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공에 맞선 선조들의 고난한 투쟁과 승리가 있다.
1866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공해 점거하자 양헌수 장군(1816~1888)은 상륙작전을 통해 당시 유일하게 함락되지 않은 삼랑성으로 침투한다.
그리고 군인과 각지에서 온 포수 등 500명으로 전투준비에 나선다.
‘1866년 11월 9일 매복과 기습공격으로 프랑스군과 격전을 벌여 6명을 사살하고 약 70명을 다치게 하는 전과를 올린다. 양헌수 군대는 1명 전사, 4명 부상이었다.
프랑스군 지휘관 로즈 제독은 성을 함락하기엔 병력이 모자란다며 이튿날인 11월 10일 강화도에서 철수한다. 화력이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전과를 올린 것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 때문이다.’<출처:양헌수 승전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승리와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높이 181cm, 폭 60cm, 두께 27cm의 화강암 비석이 1873년 건립됐다.
앞면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摠梁公憲洙勝戰碑)’라고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양헌수 장군의 공적이 수록돼 있다고 한다. (비각이 잠겨있어 직접 보지는 못했다)
당시 전쟁에 임하는 양헌수 장군의 각오는 『병인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말에 오르니 집을 잊어버리고,
성을 나오니 내 몸을 잊어버렸노라. ……
이제 장차 바다를 건너려고 하는데,
맹세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김원모. ‘병인일기의 연구.’ 『史學志』,Vol.17, No.1, p.210>
전등사(傳燈寺)는 고려 충렬왕과 혼인해 14년을 살았으나 원나라 제국공주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별궁으로 쫓겨난 비운의 정화궁주가 옥등과 대장경을 시주해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그 사연은 안타깝지만 불법의 진리를 계승하는 뜻을 품은 전등사.
‘자연과 역사, 신화와 전설이 깃든 현존하는 最古의 사찰’이라고 스스로를 내세운다. ///T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