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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구한 ‘반야용선’…추사의 마지막 글씨

[순례노트2-⑭]서울 봉은사와 추사 김정희 '판전'

by 동욱 Jan 24. 2025

‘사천 생명이 풍전등화’

섬같이 된 곳에서 꼼짝없이 죽게 생겨...

1925년 7월 18일 조선일보 호외 1면 첫기사다.

1925년 7월 18일자 조선일보 호외 1면(출처: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뚝섬 상부에 있는 잠실 신천의 약 4천명이 물속에 있어 절명 상태에 놓였다고 전한다. 배가 들어갈 수도 없어 살려달라는 ‘애호성’이 차마 들을 수 없이 울려왔는데 그동안 모두 사망했는지도 알 수 없다’


1925년 을축대홍수의 참상을 전한 기사다.

서울 봉은사 법왕루 외벽 벽화

을축대홍수는 1925년 7월부터 9월까지 4차례 전국을 휩쓴 물난리다. 특히 서울에서는 7월 15일부터 7월 18일까지 나흘 동안 650mm의 비가 내렸다. 서울이 사실상 잠겼으며 400여 명이 숨지고 1만 2천 호의 가옥이 유실됐다.     

청호스님 수해민 구제 벽화

위태로운 상황에서 배를 구해 백성을 물에서 건져낸 스님이 봉은사 주지 청호 화상(1875~1935)이다. 중생구제라는 불교의 이상을 현장에서 직접 이뤄낸 것이다.     

1925년 7월 23일 동아일보 3면. (출처: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목선 3척을 주선해 114명을 구해 자기 절에 수용하고,18일에는 목선 2척을 사 잠실주민 228명을 구하는 등 봉은사에 수용된 자만 4백 4인이더라’ <동아일보,1925.7.23>

서울 봉은사 청호스님 사리탑과 수해구제공덕비

봉은사 부도전에는 청호대사의 사리탑과 수해구제공덕비가 서 있다.


수해구제공덕비 중앙 비문 양쪽에는 ‘을축년 7월 홍수로 선리·부리·잠실의 뽕나무밭이 큰 물에 잠기고, 708인 다급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목숨을 구해 달라 외쳤다. 청호 대사가 자비로움으로 이를 구제하니, 그 덕을 잊을 수가 없구나.’ 라고 공덕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어 놓았다.

수해구제공덕비 내용 乙丑七月 洪水懷襄 船浮蠶室 變桑而滄 七百八人 呼號蒼黃 我師慈濟 德不可忘

구한말 사회 운동가인 월남 이상재 선생(1850~1927)은 “반야의 거룩한 배 가는 곳 마다(般若船行處), 중생들 다 같이 살아나네(衆生性命全).”라며 청호 대사의 공적을 기렸다. <『불괴비첩-나청호화상의 을축년 수해구제 공덕문아』, 동화인쇄공사, 1985, p.28>    

서울 봉은사에서 본 풍경

서울 봉은사는 강남 한복판에 있는 절이다.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여 전통과 현대가 어울리는 쉼터 같은 곳이다.

봉은사가 이곳에서 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조선 중기 허응당 보우대사(1509~1565)의 역할이 컸다. 

 

조선 명종 때 문정왕후의 권유로 1548년 봉은사 주지를 맡았고, 도첩제를 실시해 스님 5천명의 신분을 안정시켰으며, 승려의 과거시험 승과를 부활시켜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 같은 큰 스님을 배출했다.

서울 코엑스 앞에 있는 승과평 알림비

승과는 봉은사 앞 코엑스 주변에서 실시됐는데 그 터를 승과평 (僧科坪) 또는 부처를 뽑는 선불장(選佛場)이라 불렀단다.


숭유억불시대, 불교 중흥에 큰 공을 세운 보우대사는 유학자들의 비판을 한 몸에 받는다.


온라인 조선왕조실록에서 普雨(보우)라는 이름으로 검색해 보면 명종 때부터 인조 때까지 197건의 기사가 나온다.

서울 봉은사 허응당 보우대사 봉은탑

대부분이 ‘보우를 추국하라, 죄를 물어라, 처벌하라’는 것인데 심지어 ‘죽여라’라는 상소까지 나온다. 나라를 어지럽히는 요사스러운 승려, 요승(妖僧)이라는 수식어도 따라 다닌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 이이(1536~1584)가 쓴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라는 상소문이 대표적이다.

    

불교 후원자인 문정왕후가 숨지가 유생들의 공격은 보우대사에게 집중됐고, 불교 중흥의 의지는 결국 꺾이고 말았다. 1565년 제주도로 유배된 보우대사는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주살당했다.      

입적할 때 보우대사가 남긴 임종게는 허응당집(1573)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허깨비가 허깨비 마을에 들어가(幻人來入幻人鄕)

오십여 년을 미치광이 장난쳤었지(五十餘年作戱狂)

인간의 영욕을 한껏 희롱하다가(弄盡人間榮辱事)

스님의 탈을 벗고 저 하늘로 올라가네(脫僧傀儡上蒼蒼).” <보우 지음,배규범 옮김,『허응당 시선』, 지식을 만드는 지식,2012,p.200>

서울 봉은사 판전

봉은사 부도전과 법왕루, 대웅전을 본 뒤 경내로 더 들어가면 판전이라는 전각이 보인다. 무심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1939년 화재로 봉은사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됐지만, 유일하게 화마를 피한 곳이 판전이라고 한다.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남호 영기율사(1820~1872)가 1856년 판전을 짓고, 화엄경소초 81권을 판각해 봉안했다. 이후에 유마경 등을 더 판각해 현재는 3438점의 판각을 보관하고 있다.     


영기율사는 판전을 지은 뒤 추사 김정희의 과천 집을 찾는다. 판전과 북극보전, 영산전 현판과 주련 글씨를 부탁하자 ‘부처님께 귀의할 생각을 하던’ 추사는 흔쾌히 수락한다.   

가로 181㎝, 세로 77㎝의 판전 현판 글씨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런데, 「판전板殿」 글씨를 대하면 삐뚤빼뚤해 보이는 데 잘 쓴 글씨인가? 의아한 생각이 먼저 든다. 


흔히 추사의 글씨를 ‘완전하고 정교한 재주를 자랑하지 않고 언뜻 보기에는 서투른 것 같다’는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에 비유하지만 그래도 잘 모르겠다.      

추사는 평생의 벗이자 정치적 후견자인 이재 권돈인(1783~1859)에게 보낸 편지에서

     

“능란하다, 서투르다 또 따지지 마시라”며 (工拙又不計,공졸우불계)<완당전집 3권 27>       


“비록 내 글씨는 말할 게 못 되지만, 70년 동안 벼루 10개를 먹으로 갈아 구멍 뚫었고, 붓 천 개를 몽당자루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吾書雖不足言 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오서수부족언 칠십년 마천십연 독진천호)<완당전집 3권 33>


평범한 순례객이 그 오랜 수련 과정과 노력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판전」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拙)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 같기도 하고 지팡이로 땅바닥에 쓴 것 같기도 한데 졸한 것의 힘과 멋이 천연스럽게 살아있다. 이쯤 되면 ‘불계공졸’도 뛰어넘는 경지라고나 할까. 아니면 극과 극이 만나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나로서는 감히 비평의 대상으로 삼을 수조차 없는 신령스런 작품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유홍준,『완당평전2』,학고재,2002,p.761>     

추사가 「판전」을 쓴 뒤 ‘일흔 한 살의 과천 노인이 병중에 썼다(七十一果病中作)’고 적었다. 그리고 사흘 후인 10월 10일에 돌아가셨다고 하니 판전 글씨는 추사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기력이 쇠한 병든 노인이 태초로 돌아가기 직전에 썼으니 혼신의 힘으로 쓴 역작(力作)이 분명하다.

제자 소치 허련이 추사의 제주 모습을 그린 '완당선생해천일립상' (출처:국립제주박물관.한겨레)

“붓이 너무 무거워 땀을 뻘뻘 흘렸다. 숨이 가빴다…추사는 지친 몸을 일으키고 붓을 들어 올렸다.

해서도 전서도 예서도 행서도 초서도 아닌 글씨를 종으로 썼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시원의 하늘 한 가운데로'

歸去來兮 歸去來兮 太虛中     


한동안 땅바닥에 누운 채 숨을 가쁘게 쉬고 난 추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마찬가지의 내리글씨로 썼다.     


'저 높은 곳으로 가게 해주십시오'  

南無阿彌陀佛”  

 <한승원,『추사2』,열림원,2023,pp.266~268>     

///TOK///     


*주) 이 글에서 인용한 추사 김정희 선생의 완당전집 원문과 풀이는 한국고전번역원의 데이터베이스를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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