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노트2-⑮]평창 월정사와 한암·탄허 스님
달의 정기를 받은 곳.
월정대가람 현판을 단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숲길은 언제 찾아도 운치 있다.
높이가 30미터 가량되는 1천 그루의 전나무가 뿜어내는 기운은 맑고 청아하다.
그 길을 따라가면 우리 토속 신앙을 품은 성황각도 있고, 600년 세월의 무게를 끝내 견디지 못한 나무도 눈에 띈다.
이 곳을 잘 아는 지인은 눈 쌓인 오대산과 전나무숲길, 월정사는 또 다른 정취를 준다며 때를 잘 맞춰 꼭 한번 가 보라고 권했다.
1월 중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월정사를 찾았다.
열흘 전쯤 내린 눈은 대부분 녹았고 숲길 곳곳의 잔설만 보게 돼 아쉬운 마음이었다.
눈 덮인 전나무 숲길은 어떤 풍경일까?
검색해보니 평창군 문화관광포털(tour.pc.go.kr)이 올린 ‘설국' 사진이 정답일 것 같다. 이 글 제목의 배경이 된 ‘흰 눈 내려앉은 월정사’사진도 평창군 문화관광포털 작품이다.
금강문을 지나 월정사 경내로 향하면 적광전 앞 우뚝 솟은 석탑과 조각상을 만나게 된다.
국보 48호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48-2호인 석조공양보살좌상이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유명하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봤을법하다. 요즘 중학교 2학년 수업·연구자료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팔각 다층석탑의 하나로 이러한 양식의 석탑 가운데 가장 남쪽에 건립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당시 불교문화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는데, 중학교 역사교과의 고려 성립과 변천을 학습하는 단원에서 고려시대 문화재의 예시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출처:에듀넷 티 클리어>
‘높이 15.2미터로 우리나라 팔각석탑으로는 가장 크다. 연꽃무늬로 치장한 이층기단과 균등하고 우아한 조형미를 갖춘 탑신, 완벽한 형태의 금동 장식으로 장엄한 상륜부, 각 층마다 달려있는 청동 풍경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고려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이라고 월정사는 소개한다.
특히 1970년 해체 복원할 때 은빛 불상 1점과 진신사리경을 포함해 12점의 사리구가 나왔다. 부처님의 몸이나 다름없는 사리가 봉안됐으니 팔각구층석탑은 그 자체로 석가세존을 상징한다.
그런데 순례자의 시선은 오히려 석탑 앞에 앉아 있는 보살상에 더 많이 머무른다. 누구이기에 한쪽 무릎을 꿇고 석탑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리고 있을까?
가지런히 모은 두 손에는 향을 들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공간도 얼핏 보인다.
신라 자장율사 이래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늘 계시는 성지로 자리 잡았으니 보살상은 문수보살일 거라는 짐작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탑 앞 공양보살상의 존명은 경전에 의거 ‘동북방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계시면서 1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항상 설법한다’는 곳의 청량산을 오대산에 비정함으로써 오대산이 문수신앙의 상주처가 되었다.…월정사 탑 앞 보살상은 오대산신앙의 상징이며, 사리탑에 향을 공양하는 ‘문수보살’로 보았다. 고려 때 문신 정추의 싯구 ‘자장의 오래된 절에는 문수가 있고’ 에서 ‘문수’는 탑 앞의 보살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최경애,「오대산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앞 공양보살상 연구」,동국대 석사논문,2012.p78>
그런데 문수보살 정도의 권위이면 석가모니 부처님 옆에서 보좌하는 모습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이런 저런 궁금증에 자료를 더 찾아보니, 석조보살을 약왕보살로 본 옛 문헌들도 찾을 수 있었다. 묘법연화경(법화경)의 한 장면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2023년 6월 문화재청(지금의 국가유산청)이 일본에서 환수한 고려 사경 묘법연화경 변상도를 보니 아하! 하는 느낌이 왔다.
묘법연화경을 설법하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주위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데, 왼쪽 아래를 보면 ‘불타는 화염 속에 자신의 몸을 바쳐 공양하는 약왕보살’의 극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묘법연화경의 ‘약왕보살본사품(藥王菩薩本事品)’ 장면이다.
약왕보살의 전생은 희견보살이었다.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우침을 얻게 되자 자신의 몸을 태우는 공양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받아 태어나자 부처님 사리를 팔만 사천개 사리탑에 모시고 보배로 장식했다고 한다. 또 탑 앞에서 7만 2천년 동안 공양했는데 이 분이 약왕보살이라는 것이다.
“병의 근원을 제거해 중생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성불의 길로 인도하고자 원(願)을 세우신 분이 약왕보살(藥王菩薩)이다. 일광 또는 월광보살이 모든 재난을 제거하는 보살이라면 약왕은 그 외연이 좀 더 구체화 돼 병에 대한 처방과 치료약을 제공하는 으뜸가는 보살로 인식되었다. 또 중요한 특징은, 자신의 몸을 남김없이 태움으로써 부처님께 바치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의 정신을 보여준다.” <김광호(다정),「월정사 약왕보살상 연구」, 중앙승가대 석사논문,2013.p.15>
그런데 월정사 적광전 앞에 있는 석조공양보살좌상은 진품이 아니다. 비바람과 세월에 훼손될 것이 걱정돼 복제품으로 대체했다.
국보48-2호인 높이 1.8미터의 진품 석조공양보살좌상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의 커다란 방에 잘 보존돼 있다.
문수신앙과 약왕보살의 이야기로 흥미로운 오대산과 월정사.
한국 불교사의 두 어른이 결정적인 인연을 맺고 중생 구제와 불교의 초석을 다진 요람이기도 하다.
한암과 탄허, 두 큰 스님이 주인공이다.
한암대종사(1876~1951)는 어릴 적 당연히 유교경전을 읽으며 배움을 시작했다.
‘9살 때 『사략(史略)』을 공부하면서 ‘천황씨天皇氏’ 이전에는 ‘반고씨盤古氏’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반고씨盤古氏’ 이전에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은 끝내 풀지 못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문제의식은 유교를 넘어서 불교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염중섭(자현),「한암 중원의 선불교와 교육사상 연구」, 동국대 박사논문,2020,pp.33-35>
1925년 을축대홍수때 봉은사 조실이었던 한암 스님은 주지인 청호 스님과 더불어 강에 빠진 수재민 708명을 구조해 먹이고 재웠다. 이 일로 ‘활불活佛’이라는 찬사도 듣게 됐다. <염중섭(자현),2020>
하지만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이런저런 요구에 한암스님은 “내 차라리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될지언정, 춘삼월春三月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배우지 않겠다.(寧爲千古藏蹤鶴, 不學三春巧語鸚)”는 시를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로 들어간다. 그리고 27년간 두문불출하며 수행자의 본분을 지키고 불교를 더욱 맑게 하는데 정진한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일제 총독부 오노 정무총감이 오대산을 찾아 한암 스님을 면담한 일화가 좋은 예다. ‘오노 정무총감이 ‘이번 전쟁은 누가 이기겠느냐?’고 직설적으로 묻자 ‘덕 있는 사람이 이긴다(德者勝)’는 명답을 내놓았다. 평생 지침이 되는 법문을 요청하자 ‘바른 마음을 가져라’는 정심(正心) 두 글자를 써 주었다.’ <‘정무총감 오노와의 대화’,「한암일발록」,월정사 홈페이지>
한암 스님의 한평생 수행 생활에 있어 가장 큰 인연은 탄허 대종사(1913~1983)일 것이다.
탄허스님은 유년시절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던 부친의 민족의식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한문과 유학, 노자와 장자를 치열하게 공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노자와 장자에 대한 풀리지 않은 의문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내가 노장사상을 연구하다가 중이 된 사람이거든. 내가 이십 줄부터 노장사상에 파고들다가 선생님이 없어서, 그래서 선생을 구하다가 방한암 스님이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해보고, 참 도반이 넓은 것 같아서 3년간 편지로 굉장히 연애가 깊어서, 그러다가 따라와서 중이 되었거든”
<김광식,「탄허의 시대인식과 종교관」,『한국불교학』 63호, 2012, p.18>
탄허 스님이 20살이던 1932년에 배움을 구하기 위해 한암스님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나이가 20세로서 근기가 박약하고 배운 것도 형편없어 도를 듣는다 해도 믿지 못하고 도를 믿는다 해도 돈독하지 못하여…나귀를 타고서도 나귀를 찾는 허물이 있으며, 벽돌을 갈아 거울로 만드려는 병폐에까지 이르렀사오니 참으로 탄식할 만 하옵나이다…오직 바라는 바는 가르침을 얻어서 그 허물을 적게 하는 것 뿐이옵니다.”<‘한암선사께 보낸 서한’,「탄허스님방산굴법어」,월정사 홈페이지>
한암스님은 “이미 마음달이 서로 비추었으니 묵묵히 있음은 옳지 않기에 문장을 엮어 보내니, 받아보고 한번 웃을지로다.”라며 탄허스님에게 답서를 보낸다.
“만일 도를 배운다는 생각이 있다면 문득 도를 미(迷)함이 되나니, 다만 그 사람의 한 생각 진실됨에 있을 뿐이다.…반드시 시끄럽다고 고요한 것을 구하거나, 속됨을 버리고 참됨을 향하지 말지니라. 매양 시끄러운 데서 고요함을 구하고, 속됨 속에서 참됨을 찾아, 구하고 찾는 것이 가히 구하고 찾음 없는데 도달하면, 시끄러움이 시끄러움이 아니요, 고요함이 고요한 것이 아니며, 속됨이 속된 것이 아니요, 참됨도 참된 것이 아니니라.”<‘제자 탄허에게 보낸 답서1’,「한암일발록」,월정사 홈페이지>
탄허 스님은 당초 석 달간 머물면서 한암 스님의 가르침을 받기로 했으나, 불교라는 ‘학문’에 눈을 뜨면서 22살 때 출가해 한암스님을 모시고 15년을 수행한다. 탄허스님은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하다, 노장 사상을 다시 한 번 보니 자연스럽게 풀렸다’고 한다.<김광식,2012>
조계종 중앙역경원 초대원장으로 불경의 한글 번역에 큰 공을 세우고 동양철학과 비교종교학에도 해박해 세계적인 석학으로 추앙받은 탄허스님.
일제 강점기 총독부의 외압을 막고, 조계종이라는 이름을 제안해 우리 불교의 초석을 다졌으며, 대중과 호흡하며 맑고 청정한 수행과 가르침으로 ‘성자(聖者)라는 표현이 어울린다’는 한암스님.
두 큰 스님의 만남이 꽃 핀 월정사와 상원사, 오대산.
이 곳이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문수보살의 성지라는 점에서 그 인연은 결코 범상치 않고 인연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TOK///
*주) 평창 월정사 편으로 『사찰 순례자의 노트2』를 마무리한다. 그동안 절 30여곳을 찾았고 순례기 33편을 썼다. 여전히 가서 보고 싶은 절은 많다. 세 번째 사찰 순례자의 노트를 쓸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