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외로움을 어떻게 견뎠을까?
어렸을 적, 난 아버지의 얼굴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포클레인 운전기사였던 아버지는 일거리를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녀야 했는데, 그렇다 보니 집에 자주 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매번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기다렸던 것 같다.
항상 그리워하던 아버지였기 때문에, 어쩌다 얼굴을 볼 수 있을 때면 난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 옆에 꼭 붙어서 아무 데도 가지 못하게 했었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새벽에 몰래 떠나려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너무도 서럽게 울어서 난감했던 일도 있었다 한다. 어린 마음에도 또다시 아버지가 떠나갈까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내가 어릴 적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서럽게 울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아버지가 자주 해외에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큰돈을 벌어오겠다며 쿠웨이트나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중동국가의 건설현장에 자주 나갔는데, 한번 해외로 나가면 보통 1년에서 2년 정도는 아버지의 얼굴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어린 나로서는 아버지가 영영 떠나는 것 아닌가 하고, 언제나 불안해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다 보니, 당연하게도 아버지가 해외근무를 마치고 들어오는 날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연필이며, 신기한 장난감 같은 것들을 한껏 사 가지고 돌아와서는 나에게 선물을 한 아름 주셨다. 그리고는, 나를 옆에 앉혀두고, 그곳에서는 덜 익은 바나나를 고구마처럼 구워 먹는다는 둥, 해외에 있으면서 겪었던 신기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다. 아버지가 주신 선물보다, 나는 그런 아버지 곁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도 좋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렸던 나조차도 그렇게 아버지가 그리웠는데, 어머니는 얼마나 더했을까? 하는 생각.
신혼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결혼하자마자 사랑하는 남편을 해외로 보내고 홀로 지내야 했던 어머니… 주변에 의지할 곳 없는 스무 살의 어린 어머니는 그 많은 기다림 속에서 어떻게 그 외로움을 견디셨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내 어릴 적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머니가 당시 어떻게 생활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단지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어머니는 항상 무언가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 이사를 자주 다녔다는 것, 동네 아주머니들과 어머니가 아주 친하게 지냈다는 것, 그리고 항상 밝게 웃고 계셨다는 것 정도다.
어머니는 항상 뭔가 일을 했던 것 같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동네 친구들과 같이 놀다가 간혹 나는 어머니가 일하는 곳에 가서, “엄마, 100원만…” 하고 말했던 기억은 남아 있다. 뭔가 미용실 같은 곳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다. 그렇게 내가 부탁할 때면, 어머니는 항상 웃으면서 나에게 100원을 쥐어 주셨다. 내가 원할 때면 언제나 100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인지, 그 당시 우리 집이 가난했다는 것도 난 알지 못했다.
우리 집이 가난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사다. 우리는 정말 많이도 이사를 다녔다. 내 단편적인 어릴 적 기억들을 더듬어 보면, 그 기억 속 장소가 매번 달랐다. 어떤 장면에서는 집 주위로 논밭이 펼쳐져 있었고, 어떤 장면에서는 집 앞에 큰 도로가 있었다. 한옥 집이었던 장면도 있었고, 양옥집이었던 장면도 있었다. 어렸을 적 나는 가난을 직접적으로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많이 이사를 다녀야 할 만큼 가난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당시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사실들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은, 내가 어려서 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어머니의 밝은 웃음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어디를 가든 항상 일을 했고, 그곳에 살고 있는 동네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시골 같은 곳에서도, 도시에서도, 그곳이 어디든 어머니는 그 밝은 성격으로 주위 사람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어머니가 그렇게 동네 주민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온 것은, 그렇게 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 좋은 일도 있는가 하면 나쁜 일도 있고, 좋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쁜 사람도 있는 곳이 사람 사는 곳이다. 어린 어머니가 남편도 없이 과부 아닌 과부로 살고 있는데, 과연 그 당시 사람들이 항상 위로만 하고 격려만 해줬을까?
분명히 어린 어머니를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21세기인 지금도, 미혼모나 과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곱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비록 미혼모나 과부는 아니더라도 남편과 떨어져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어머니를 당시 사람들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지는 불 보듯 뻔하지 않을까? 다른 시대도 아닌 1970년대였으니 말이다.
그런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는 동안 어머니는 비록 웃고 있었지만, 남편의 빈자리에 얼마나 많은 외로움을 느꼈을까? 사람들의 이기적인 시선에 그 당시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느꼈을까?
어린 나이에 주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고, 한편으로는 해외로 나가 있는 사랑하는 남편의 빈자리에 어머니는 많이도 괴로워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는, 집에 남아 있던 그 많은 공테이프의 양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공테이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주고받았던 서로 안부를 묻는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당시에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었고, 해외로 전화를 하려면 교환원을 통해서 연결을 해야 했다. 아버지가 일하시는 곳의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 해도, 그래서 교환원을 통해 연락할 수 있었다 해도, 아랍어를 모르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바꿔 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리운 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공테이프에 서로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보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 공테이프를 발견하고 어머니에게 이게 무엇인지 물었을 때 어머니는 멋쩍어하며 아버지와 주고받던 것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그 공테이프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나에게 들려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린 아들인 나에게는 항상 웃음 짓는 강한 어머니였지만 어머니도 한창 사랑을 알 나이이고 그리움을 알 나이였으니, 아마도 그 속에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괴로움과 무서움, 그리고 떨어져 지내야 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