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 엄마
“나는 이제 병신이니까! 사지 멀쩡한 너희들이 당연히 나에게 모두 맞춰 줘야 하는 것 아냐? 그것도 못 해줘? 내가 병신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자포자기한 것인지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는 아버지에게,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해 보려고 노력해야 빨리 나을 수 있지 않겠냐고 우리들이 말했을 때, 아버지는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서러웠는지 울분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외침에 순간 멈칫했다. 아무도 아버지를 무시하지 않았건만, 아버지는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고 느꼈나 보다. 그동안,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들이 무심코 했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상처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하반신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발가락 끝에서는 희미하게 신경이 살아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발가락을 만지면, “지금 발가락을 만지고 있지?” 하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금방이라도 아버지가 일어날 것이라 여겼다. 조금만 노력하면 될 것 같았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당신이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이라도 나아서 걸을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열심히 재활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하루하루 달라지는 당신의 모습에 기뻐했다. 물론, 사지마비 환자들이 그러하듯 불시에 저혈압 증상이 나타나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는 아버지가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에 매우 기뻤다. 누구라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던 다리를 어느 날 갑자기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그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생각보다 빨리 마음을 추스르고, 어떻게 든 이겨내려 하니 기쁠 수밖에.
하지만, 아버지의 결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하는 듯했다. 어느 때는, “그래, 열심히 해 보자.” 하는 마음이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절망에 사로잡히고는 했던 듯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 보려 해도, 좀처럼 진전되는 것 같지 않은 현실의 벽에 부딪친다면, 누구나 절망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할 것이니까. 생각해보면, 당시 내 아버지도 그런 심정이었을 것 같다.
아버지는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갔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옆에서 온갖 투정을 받아주는 어머니가 주된 대상이었다. 아버지의 처지가 불쌍해서 어떻게 든 도우려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오히려 화를 내기 일쑤였다. 병실에서 워낙 난리를 쳐서 간호사들이 쫓아오기도 했고, 그러면 어머니는 미안하다면서 대신 사과하고는 했다. 아버지의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같은 병실을 쓰던 환자들이 오히려 어머니를 걱정할 정도였다.
어머니는 점점 기력이 없어져 갔고, 얼굴에서 생기도 점점 사라져 갔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까지 와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몇 개월 동안 병시중을 들어야 했으니 지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동안 잠도 편하게 잘 수 없었고, 제대로 된 음식도 먹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시도 때도 없이 떼를 쓰고 화를 내는 아버지의 등살에 피곤은 점점 쌓여만 갔다. 이러다가 어머니가 먼저 쓰러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결국, 동생과 나는 간병인을 구해서, 잠깐이라도 어머니를 쉬게 해 드리기로 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동생이 같이 동행해 주었다. 서울 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서였다. 그때 같이 동행했던 동생이 나중에 해주었던 이야기가 내 귓가에 남아, 마음 아프게 했다.
어머니를 버스에 태워 보내 드리기 전, 동생은 버스 출발 시간이 남아 어머니와 함께 터미널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고 했다. 그때, 어머니는 음식을 드시면서, “너무 맛있다. 맛있어.”라고 연신 되뇌었다고 했다. 터미널에서 파는 흔한 국밥을 드시면서도 연신 맛있다며 행복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동생은 너무나 안쓰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 참느라 혼났다고 했다. 겨우 국밥 한 그릇에도 이렇게 행복해하는 분인데… 그런 어머니의 기구한 운명이 동생을 눈물짓게 만들었던 것 같다. 내가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그런 것처럼…
하지만, 어머니의 짧은 휴가도 금방 막을 내려야 했다.
어머니가 고향으로 내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간병인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며 얼토당토않은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세면대에서 간병인이 자신을 함부로 다룬다는 말부터, 사람들이 있을 때는 안 그러는데 안보일 때면 자꾸 자신을 때리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는다며, 매일 같이 전화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어머니의 휴가는 우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채 열흘도 채우지 못하고 끝나야 했다.
우리는 고생할 어머니가 너무도 안쓰러워, 아버지는 신경 쓰지 말고 좀 더 편하게 쉬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어머니는 결국 다시 서울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래도 조금 쉰 것이 도움이 된 것일까?
돌아온 어머니의 표정은 이전보다는 훨씬 좋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아침 아버지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주무르고, 그 작은 몸으로 끙끙거리며 휠체어에 태워 병원 근처를 산책하고는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해주었다. 몸이 불편하다고 하면 조금이라도 편해지라고 이곳저곳을 주물러 주었고, 대변도 받아주고 정성껏 씻겨 주기도 했다.
그렇게 어머니는 그 모든 것을 묵묵히 견디며, 아버지를 돌보았다. 2014년 8월, 교통사고를 당해 반신불수가 된 후부터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병원 생활을 해야 했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아무런 불평도 없이 아버지의 그런 투정을 받아 주었다. 5년이라는 그렇게나 긴 시간 동안…
어느 주말, 아버지가 재활치료를 하고 있는 병원을 찾은 나는 어머니와 함께 잠시 산책을 나왔는데, 그때 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엄마, 아빠 돌보느라 많이 힘들지?”
그러자 어머니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아들~ 엄마는 괜찮다. 괜찮아. 걱정하지 말아. 덕분에 이렇게 주말마다 아들 얼굴도 볼 수 있으니까 엄마는 오히려 좋다”
어머니는 불편하고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으면서도, 나를 보며 그렇게 괜찮다고, 오히려 행복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병원 주변을 산책하는 내내, 아버지에 대해 소소한 뒷담화를 하면서 그렇게 웃고 떠들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어머니의 고충을 이해하고 있음을 어떻게든 알려드리고 싶었고, 잠시나마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위로해 주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아실까?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며 웃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동안, 내 마음은 너무도 슬펐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