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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은 사람들

4분 33초 존 케이지가 허문 경계

by 여운

요즘도 가끔 '4분 33초'라는 연주곡이 연주되곤 합니다.


1952년 초연된 존 케이지의 작품. 뉴욕의 우드스탁 타운 홀에서 David Tudor가 피아노를 앞에 앉아 4분 33초 동안 침묵으로 연주한 곡입니다.

당시 연주회장을 찾은 청중들은 TACET(연주하지 말고 쉬어라)라는 악상만이 쓰여 있는 악보를 펼치고 엄숙한 자세로 안경을 끼고 스톱워치를 누르고 피아노 앞에 가만히 앉아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3악장에 걸쳐 침묵으로 연주하는 David Tudor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이보다 한해 전 존 케이지는 하버드대학의 무향실에서 듣게 된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를 들은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높은 소리는 그의 신경계가 돌아가는 소리였으며 낮은 소리는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였습니다. 무음의 세상, 절대적 침묵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존 케이지는 이때부터 소리의 주체에 대해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관객들은 연주자가 청중들이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연주를 시작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청중들은 연주의 방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절대적 침묵을 시간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도 얼마간의 긴장의 시간이 지난 후 에는 연주자가 청중이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연주를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연주자에게 환기를 주는 소음들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헛기침을 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구둣발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연주자는 연주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웅성웅성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한 청중들은 소근소근 상황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뒤를 돌아보거나 관계자를 찾기도 했을 것입니다.


긴 시간이 흐르고 시계를 바라보던 연주자는 마침내 피아노의 뚜껑을 닫습니다.



존 케이지의 낯선 질문은 음악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청자와 연주자의 건널 수 없는 수천 년의 강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청자들의 소음이 바로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예술을 일방적인 예술가의 시혜에서 청자와의 소통이 음악 혹은 예술의 본질임을 선명히 보여준 사건입니다.


수천 년에 걸쳐 흐르던 창작자와 향유자의 경계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즈음의 예술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창작자와 향유자는 서로 소통하고 대화하고 심지어 작업의 영역까지 나누기까지 합니다.


이 경계는 권력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관람의 방법 혹은 감사의 관습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이는 창작자의 권력을 관객 혹은 청자에게 권력을 나누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존 케이지는 모두에게 감동으로 가는 길을 허용하고 넓힌 것입니다.


예술은 창작자와 향유자의 경계가 없습니다.

경계를 넘나드는 그 순간이 바로 예술이 일어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존 케이지가 허문 장벽을 오늘도 우리는 넘나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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