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의 "이별노래"

시인의 마음 따라잡기 : 함께 읽는 좋은 시 3

by 여운

시는 참 다양한 얼굴을 가졌습니다.


사물도 마찬가집니다.

눈(雪)만 해도

어떤 때는 펄펄 내리는 위풍당당한 눈 같기도 하다가.

어떤 때는 부질없이 녹아내리는 슬픈 눈이 되기도 하고

혹은, 얼어붙어 반짝이는 결정이 되어 누구의 가슴이든 베어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얼음 눈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도 아니면. 녹아져 도로가에 범벅이 된 얼룩진 불쌍한 눈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의 사물인 눈도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얼굴 다른 느낌으로 보입니다.

물론 보는 사람의 시각 때문이겠지요.

일출과 일몰을 보는 눈도 그렇습니다.

새해를 맞아 동해안에 늘어서 뜨는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똑같은 해를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 각기 다른 해를 바라봅니다.

시도 그렇습니다.

똑같은 장면을 목격 하지만 시인은 그 속에 다른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합니다.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전문은 이렇습니다.



너에게 묻는다.

안 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항상 보던 길거리에 다 탄 하얀 연탄재를 보면서도 시인은 그 연탄이 뜨겁게 타올라 누군가를 위해 온몸 불살라 뜨거움을 주었던 기억을 해내고 맙니다.

그리고 자신과 혹은, 우리에게 넌 언제 저처럼 뜨거운 적이 있었는가 무섭게 반문하고 맙니다.

시는 이러합니다.



연달아 정호승의 이별 노래를 한번 읽어 봅시다.

이 시는 이동원의 노래로 우리에게 너무 낯익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는 가사와 리듬이 갖는 감동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분명코 글 만으로도 노래가 갖지 못하는 그 이상의 감동을 우리는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를 문학의 정수라 일컫는데 주저함이 없는 가 봅니다.

전문은 이러합니다.



이별 노래

정호승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 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 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시인도 결국 이별을 맞이 하나 봅니다.

그러나 그 이별을 맞이하는 모습은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시인의 이별은 정말 독특합니다.

1연을 읽어 보면 바로 그 독특함이 나타납니다.

이미 이별은 시인에게 기정의 사실인가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잡는다 거나 애원하지 않습니다. 단지, 떠나는 그대가 조금만 늦게 떠나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말의 뒤끝은 그 절절함의 끝을 보여줍니다.

“조금만 늦게 떠나 준다면 내가 그대를 사랑하기에 늦지 않는다고”

이 얼마나 극심한 역설입니까. 이론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단지 조금만 늦게 떠난다면 내가 그대를 사랑하기에 늦지 않겠다.......

하지만. 이 말이 안 되는 비문이 갖는 절절함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무게를 줍니다. 잡고 늘어지는 것보다 몇 십배 몇 백배 그 사랑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2연에서 만약, 조금만 늦게 떠나간다면 시인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합니다.

떠나는 그대보다 먼저 떠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별의 아픔을 잊기 위해 먼저 떠나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떠나는 곳 떠나갈 곳으로 먼저 가서

떠나가는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김소월의 시가 있습니다.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떠나는 님이 가도록 꽃을 뿌려주겠다는 이 말도 안 되는 배려가 정호승 시인에게 와서는 한술 더 뜨고 맙니다.

하지만, 1연의 애절함은 더욱더 깊이를 더하고 맙니다.

내가 만약, 떠나는 당사자라면 저렇게 까지 안타까이 보내는데 어찌 떠나겠습니까.

아마. 피눈물을 흘리더라도 돌아서고 말겠지요.

저 표현은 그래서 가지 마라는 말보다 몇 만 배의 갑이 있습니다.


3연 역시, 더 한심할 뿐입니다. 님을 보내고 나서 나는 슬픔에 눈물짓겠다는 게 아니고

별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다들 잠든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진..) 한밤에도 그대를 위해 노래까지 하는 별이 되겠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4연은 다시 1연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4연은 이제 반복이 아닙니다. 1연의 고백보다 몇 배 깊이 있는 이별에 대한 부정이 되고 맙니다.

시의 이후는 그래도 그(그녀)가 떠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떠났다 해도 너무 가슴 아프고 애절한 이별이며,

저러한 만류를 뿌리치고 갈 만큼 더 애절한 떠남이기 때문에

떠나는 사람 역시, 아름답습니다.

아니면, 시인의 절절한 애원으로 다시 아니 조금 늦게 혹은 아주 늦게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시는 이해할수록 이래서 아픕니다. 하지만 아름답습니다.

우리도 한번, 일상을 이렇게 상식 적이지 않은 눈으로 보고 고민해 볼 수 없을까요.

그것이 안 된다면, 같이 느껴 보기라도 한다면.



몇 줄의 시를 이리 긴 말로 흐려놓은 거 같아 맘이 불편합니다.

시는 장식이 싫습니다.

시와 함께 아무리 좋은 그림도 아무리 좋은 음악도 불필요한 치장에 다름 아닙니다.

원래, 시는 시만으로 족합니다. 아니, 남아돕니다.


시집 한권 빼어 들고 커피 한잔 손에 들고

봄이 사락사락 다가서는 이 늦은 밤

낭만적인 시 읽기 한판 하심이 어떨지요.

봄이 더 빨리 올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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