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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pmage Aug 07. 2015

제주 여행, 마음 빗장을 풀고

두 번째 이야기

제주에서 뚜벅이 여행을 하다 보면 이름을 모르고 안면식 조차 없는 친구들을 만난다. 우연히 몇 차례 같은 버스를 타면서 스치듯이 익힌 얼굴들. 비자림, 세화리, 성산일출봉을 오고 가는 701번 버스에서 만났던 그들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조우했을 때, 왠지 제대로 찾아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혼자만의 여행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든다. 오늘 비자림 버스정류소에서 만난 친구들 중 한 명을 위해 지루한 듯 기지개를 피우며 벤치 자리를 내주었다. 이런 나의 작위적이고 어색한 상황을 대신  마무리해주는 듯 701번 버스가 비자림 버스정류소에 때마침 와주었다.


도무지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는 곡선으로 뻗어간 비자나무의 나뭇가지들이 바람과 함께 비자가루 향연을 버린다. 바람이 잦아들면서 향연이 잠시 멈추었다. 나도 잠시 멈추어 나무들의 키와 둘레를 눈대중으로 가늠해 본다. 그러나 바라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알 수 없다. 용기를 내 오솔길 안쪽으로 더 들어가 비자나무 위를 향한다. 마치 영화 ‘판의 미로’에 나오는 숲 한가운데를 우뚝 서있는 나무 수령을 바라보는  듯하다. 다시 머리 위로 바람이 거세게 힘차게 오른다. 그리고 다시 비자나무 가루가 그 아래로 제멋대로 흐트러지며 퍼진다.


표를 사지 않고 비자림에 입장한 것을 자랑스럽게 떠들던 미국인 무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조용히 걷던 두 백인 여성이 나의 동선과 자주 겹쳤다. 그러다 다시 갈라졌다 만난 곳이 비자림 연리지 앞이었다. 그 둘은 연리지를 바라보며 조용히 나긋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무가 반 갈라져 분리된 모습이 마치 하트 모양처럼 보인다고 하길래, 나도 모르게 이건 연리지라고 말해줬다. 절대 이별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의 상징이라며. 원래 서로 다른 나무가 서로 뒤엉켜 서로를 지탱해주는 하나가 된 나무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짧게 덧붙여 말하면서 그 둘과 헤어졌다. Never separated.


세화리 앞바다. 평대리의 바다와는 또 다르다. 세화리 바다는 옥색 비단에 검은 먹이 엷게 번지어진듯이 아름답다. 옥색과 검은색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었던가?



낮고 넓게 드리워진 회색 구름 무리와 옥색 바다를 병풍으로 두른 세화 해변 주차장에서 육각정자를 기점으로 좌판들이 “S”자 모양으로 두서없이 펼쳐졌다. 좌판에 올려진 물건을 보고 있자니 눈을 돌려 지나칠 수 없다. 호객꾼 따위는 없다. 찾아주는 손님 앞에 자기 물건을 연신 자랑스럽게 설명할 뿐이다. 어떤 부부는 팔려고 내놓은 샌드위치를 매우 수줍게 내어놓는다. 물건을 보고 싸게 살려고 흥정하는 사람도 없다. 물건을 파는 사람도 물건을 사는 사람도 즐겁기는 매 한 가지인 이곳.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제주 세화리의 작은 장터마당. 여기는 벨롱장.



해녀박물관에서 내려다 본 세화리 바다. 정중앙에 벨롱장이 보인다. 이 광경을 유화로 그렸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면서 찍었다.


성산봉은  그대로인데 성산봉을 찾는 중국인들 때문에 성산봉 주위는 마을색을 잃어가는 듯하다. 성산일출봉 초입부터 중국인에 맞추어진 화장품 전문점, 커피 전문점,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점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제주가 보고 싶어 오는 그들을 막아서는 안되겠지만, 중국의 급격한 자본유입과 중국인의 씀씀이에 정신을 못 차리는 우리의 욕심 채우기를 보고 있자니 겁이 났다. 부추기는 사람도 나쁘지만 그릇된 욕심에 판단을 잃고 휘둘리는 사람도 나쁘다는 생각을 한다. 제주의 본연의 갖춤새를 두고 자본색으로 덧칠해질 때, 제주가 정말 제주로 여겨질지 의문이다. 결국 중국인들을 태운 관광버스 무리가 빠져나간 후에야 표를 사고 성산봉 발을 들였다.


볼품없었던 바깥 풍경을 나름 의미 있는 시선으로 잡아내는 것은 창(Window)이다. 눈이 담을 수 있는 뷰(View)의 가장자리를 모두 검은 여백으로 휘덮어 정면을 주시하게 만드는 이 사각의 마법은 단순히 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름에서 바라보는 제주 바다의 드넓은 풍경도 두 검지와 두 엄지가 만드는 사각 안으로 끌어당길 때, 똑같은 마법이 일어난다. 창 우측 아래 놓인 방명록과 책선반은 마법에 더 빠져들게 한다. 정말 수 분 동안 가만히 서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겉잡을 수 없는 바람과 함께 종잡을 수 없는 비가 내린다. 바람에 온 몸을 내맡긴 비가 게스트하우스의 창문과 외벽에 힘껏 내동댕이쳐진다. 바깥세상은 난리법석이 났는데 나는 겹겹히 무쇠로 무장한 듯한 게스트하우스에서 편히 앉아있다. 소금밭 한 가운데에 수상한 앉음새를 튼 게스트하우스에 비까지 내리니 할 일이 없어졌다. 결국 여자로 가득 찬 카페에서 맥주를 홀짝거리며 글 좀 끄적거리다가 툴툴대며 방으로 들어와 자버렸다. 8시간을 넘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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