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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riteller 토리텔러 Feb 18. 2022

세상에 공짜는 없다

돈을 내면 물건을 받는다.

언제부터 말을 할 줄 알았는지 모르는 것처럼 언제부터 돈을 주면  원하는 물건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만큼 돈은 자연스럽게 삶에 스며들었다. 부모님께 조르지 않고 기꺼이 내 돈을 주고서라도 갖고 싶었던 기억 속 물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부루마블, 또 하나는 아카데미에서 나왔던 로마 군선. 둘 다 정확히 금액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부루마블은 약 5천 원, 로마 군선은 약 3천 원이었던 것 같다. 지금 3천 원은 하찮은 금액이다. 대부분 식당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없는 금액이고, 대박을 꿈꾸지만 한편 돈을 버리는 기분으로 구매하는 로또 한 장을 채울 5개의 게임도 살 수 없는 금액이다. 기본거리만 갈 수 있는 택시 기본요금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필요했던 당시의 3천 원은 큰 금액이었다. 역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고등학생 때 버스 요금이 100원 정도였고, 대학 식당에서는 기본 라면을 500원에 먹을 수 있었다. 이때보다 더 어릴 때였으니 3천 원은 지금 3만 원보다 더 높은 벽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30만 원은 아니었을 것 같다.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를 이것저것 풀어내는 것은 어린 나에게 아주 큰 금액이었음을 설득하고 싶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게 필요한 돈은 3천 원보다 큰 5천 원이었다. 


그 당시라도 돈 좀 있는 사람에게 3천 원이나 5천 원은 정색할 만한 금액은 아니었을지라도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그 돈은 한두 번 소비를 꾹 참는다고 생기는 돈이 아니었다. 몇 개월은 꼬박 돈을 모아야 했다. 당시 내겐 주기적으로 쥐어지는 용돈도 없었다. 언제까지 얼마를 아끼면 언제쯤 돈이 모일지 가늠할 방법도 없었다. 왜 그걸 갖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절실히 갖고 싶었을 뿐이다. 내 유일한 선택은 그 돈이 될 때까지 부정기적으로 생기는 돈을 미련하게 모으는 방법뿐이었다. 세뱃돈, 그리고 어쩌다 만나는 어르신들이 "어머! 줄 필요 없어!"라는 어머님의 만류의 손을 비껴서 내 손에 꼭 쥐어주는 돈. 그걸 다 모았다. 이자 개념도 없고, 용돈 개념도 없고 내 머리에 들어 있는 목표는 하나. 부루마블을 갖고 싶고, 그걸 사기 위한 가격의 돈을 모아야 한다는 것. 다행히 요즘처럼 유튜브나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소비의 유혹에 시달리진 않았다. 요즘 아이들은 내 어릴 적 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만 훨씬 강하고 다양한 소비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돈은 없지만 상대적으로 소비를 유혹하는 힘도 약해 몇 달 걸렸지만 원하는 금액을 모을 수 있었을 거다. 요즘 같으면 아마 게임이든, 장난감이든, 먹을 거든 뭐든 너무 쉽게 돈을 써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마침내 샀다. 기억이 흐릿해지니 누나와 돈을 나눠서 부담했는지, 내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어머님이 일부 도와줬는지 모르겠지만 돈을 지불하고 원하는 물건을 얻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너희들은 밤새 돈놀이하니?"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게임에 몰입했다. 게임에 사용되는 돈이 너덜너덜해지고, 땅문서 카드의 모서리가 갈라져 부스러기가 일어나고, 이런저런 때가 묻고 찢어져도 버릴 수 없는 진정한 의미의 내가 돈을 주고 산 첫 번째 물건이다. 


아버지는 나의 성향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아버지는 항상 작은 것이라도 이벤트를 열고 기념하는 것을 좋아하셨고, 가족들에게 강한 리액션을 기대했다. 그에 비해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것들에 심드렁했다. 어떤 장난감을 사줘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사 온 기차 장난감을 보곤 내가 그렇게 좋아했단다. 아직도 부모님은 그 기차 이야기를 내 아내와 아이에게 한다. 일제라서 좋아했던 건지 내 취향에 맞는 것인지 몰라도 그 장난감을 내가 가지고 놀았던 기억은 남아 있다. 일제라는 단어는 지금의 일본만 알고 있는 세대는 믿지 못할 가치가 담겨 있는 단어다. 일제는 국산이란 단어와 비교되는, 최고, 최상,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물건에만 붙는 훈장 같은 단어다. 


두 가지 물건 중에 어느 것이 기억나냐고 하면 부모님께 죄송하게도 부루마블이다. 내가 너무 갖고 싶었고, 돈을 모았고, 지불했고, 부모님의 싫은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만끽했던 물건이기 때문이다. 로마 군선 이야기도 마무리를 해야겠다. 로마 군선은 결국 못 샀다. 돈을 더 모을 방법이 없었고, 그 돈을 모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자 난 이미 다른 것에 흥미를 느끼는 청소년이 되어버렸다. 


나이를 먹고 나에게도 아이가 생겼다. 아이에게 부루마블을 사줬다. 같이 게임을 했다. 다행히, 아이는 나보다 리액션이 훌륭하다. "재밌니?"라고 물으면 자동적으로 "재밌어!"라고 한다. 로마군선보다 훌륭한(=비싼) 레고 해적선도 사줬다. 나보다 30배는 더 과한 리액션을 한다. 아마 아버지가 기대했던 표정이 지금 내 아이의 표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손자를 끔찍이 좋아하시나 보다. 나보다 30배나 즐거운 표정을 짓던 아이의 기억은 어떨까? 그만큼 소중하고 기억에 남았을까? 얼마 전 아이에게 물어봤다. "부루마불 알지! 보드게임이잖아"라며 허세 섞인 지식 자랑의 꼬리표를 붙인 대답을 한다. 레고 해적선은 "그걸 사줬다고?"라며 놀란다. 부루마블이 로마군선보다 낫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의 리액션과 상관없이 아이에겐 두 가지 다 가지고 놀았던 적이 있는 장난감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둘 다 돈을 주고 샀는데 나와 아이의 차이는 뭘까?


시장경제에서는 돈을 주고 물건을 받는다는 것이 상식이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다. 그래서, 우리는 돈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재테크를 해야 한다고 용을 쓴다. 돈을 모으기 전에 하나를 생각해 보고 싶다. 요즘도 끊임없이 나에게 묻고 있고, 아이에게 주입시키려 묻는 질문이다. 


"왜 필요한데?" 

돈을 주면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이 시장경제 일지 모르지만 돈이 필요한 이유는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대가를 지불해야 수단이 돈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물건이 없다면 물건을 대가로 줘야 할 돈도 필요 없는 아주 단순한 결론이 나온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내가 갖고 싶은 물건은 무한정이지만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제한적이다. 무한과 유한을 겹쳐 놓으면 당연히 나의 선택은 유한의 범위에서 고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가 하나를 고를 때마다 내가 고를 수 있는 범위는 더 줄어들게 된다. 돈을 버는 일은 선택권을 넓히는 일이다. 돈을 버는 일을 하찮게 여기거나 산에서 나물 캐먹으며 살아도 행복했다는 선비의 삶이 최선인 양 말할 생각도 없다. 난 나물보다 고기를 더 좋아하니까. 고기 사 먹을 돈은 필요하다. 재테크로 돈을 모은다고 하기 전에 인정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무한히 늘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한한 돈은 건물을 몇 채 가진 사람도, 대기업의 재벌도, 포브스 선정 글로벌 10대 부자에 들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돈은 악마의 힘에 비견되기도 한다. 돈의 힘을 빌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100% 믿을 사람들은 없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 무한의 힘을 갖겠다는 사람은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지 주위엔 없다. 실제로 영혼을 사겠다는 악마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더 이야기할 주제는 아닌 듯하다. 우리는 항상 1과 100 사이에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30과 70 사이, 좀 더 디테일하면 45와 55 사이에서 고민을 한다. 어떤 것들은 49대 51일 수도 있다. 그래서, '딱 요만큼의 돈만 있으면 이것만큼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욕심에 흔들리고 딱 요만큼만 돈을 만들 수 있다면 손가락 마디만큼의 양심은 팔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는 않겠지만, 손가락 하나 정도는 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 손가락 정도가 보통 우리가 말하는 '관행', '관습', '그런 거', '세상 살이' 등등의 것들이다. 그러다 '요만큼'의 돈이 고무줄처럼 늘어나고 늘어나 결국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무한정의 황금'을 바라게 된다. 


아무튼 우리는 손가락 마디만큼의 돈이든 무한정의 황금이든을 떠나 항상 필요한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 고민한다. 욕심인지 아닌지, 필요한 것인지 그냥 갖고 싶은 것인지, 답을 명쾌하고 깔끔하게 내리기 쉽지 않으니 필요한 것이라 믿으며 계속 고민을 한다. 필요한 돈 고민은 점심시간 메뉴 고르는 것만큼이나 빈번히 생기는 일이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은 단순히 돈과 숫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욕심과 절제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시간과 노력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재테크를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절실함'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절실함이 없는 물건과 그 물건을 위해 지불하는 돈은 머릿결을 날리고 지나는 바람과 같다. 바람을 느낄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어디에 담아두지도 못한다. 돈을 모으려면 돈이 필요한 절실한 이유가 먼저 있어야 한다. 절실해야 돈이 모일 때까지 참을 수 있고, 돈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고, 그만큼의 행복함을 누릴 수 있다.  


절실함이 없는 물건과 돈은 액수가 아무리 높아도 절실함이 담긴 5천 원 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우리가 지불하는 돈의 액수는 적혀 있을지 몰라도 그 가치는 나의 절실함에 따라 변한다. 내 행복함 1을 높이는데 1억을 썼다면 그 돈은 1억이 아니라 1의 행복을 구매한 가치다. 행복은 절실함의 부족을 채우는 크기에 비례한다. 그래서, 돈이 많을수록 돈을 써도 행복하기 어려운지 모르겠다. 


돈 모으기 성공이란 것을 얻으려면 우린 절실함을 지불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에세이처럼 글 쓰는것이 훨씬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넣고 싶었지만 지쳐서 포기입니다. 


이 책 재밌을거 같지 않습니까? 책을 제게 버리라고 카피보이님에게 말해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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