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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n Sep 25. 2020

'시'팔이로 용돈을 버는 아이


21세기 소녀의 마흔살은 족히 차이나는 타자기



 코로나 덕분에(?!) 학교를 못 가니, 하원길에 혹시 배고프면 간식을 사 먹으라고 주던 용돈을 줄 이유가 없어졌다. 아이는 용돈을 모아서 물고기도 사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엄마가 용돈을 안 주니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 엄마, 내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지? 내가 뭘 하면 용돈을 줄 거야? 내가 매일 내방 청소하고 집 치우는 거 도와주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럴게. 그러니까 용돈 줘 응?'


'네 방 네가 치우고 공부하고 그러는 건 원래 해야 하는 건데 엄마가 그것에 대해 용돈을 주는 건 좀 아닌 거 같아. 용돈이 꼭 필요하면 엄마가 한번 고민해볼게. 어떤 방법으로 네가 용돈을 벌 수 있을지'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그래, 글이나 시를 팔아서 용돈을 벌어봐."

한마디로, 원고료를 벌어보라고 했다.


작가는 초3 딸.

원고료를 주는 보스는 나.

마음에 든다. 일단 내가 보스니까.



몇 가지 룰을 정해줬다.




1. 자유주제로 하루에 한 편의 글 또는 시를 쓴다.(하루에 한편 이상 안됨)

2. 글은 타자기로 써서 제출한다.

3. 글을 읽고 내가 마음에 드는 정도에 따라 원고료를 책정해서 준다.


(1. 하루 한 편의 제한이 없으면 돈을 많이 받기 위해서 깊게 생각도 안 하고 아무 글이나 쉽게 써버리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

2. 아이는 나를 닮아 악필. 타자기로 글을 쓰면 아이의 글씨에 대해선 잔소리할 일이 없으니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그 편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 길게 써도 좋지 않은 글이 있고, 짧아도 좋은 글이 있고. 나에겐 좋은 글도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고. 글은 결국 주관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


 평소에도 줄거리 쓰기나 독후감 쓰기는 싫어해도, 창작 글쓰기는 좋아하는 아이라서 흔쾌히 나의 조건에 동의해주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용돈 협상이 타결되었을 즈음에는 아이도 타자기를 어느 정도 수월하게 다룰 수 있을 때였다.


 아이는 내가 정한 룰을 잘 지키며 시를 썼다. 짧은 글이나 시 둘 다 상관없다고 했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시를 쓰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은 시를 잘 쓰는 게 정말 힘든데..)

 

 시를 쓰는 시간은 자기가 시상이 떠오를 때였으므로 대중없었다. 어떤 날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시상이 떠오른다며 타자기 앞에 앉아서 시를 썼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어떤 시를 쓸까 고민하다가 잠들기 직전에서야 극적으로 시를 한편 써냈다.


 밥을 먹다가, 문득 허공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에 빠지기도 했는데 그 모습을 힐끗힐끗 훔쳐보면서 -미래의 작가를 키워내는 나는 정말 너무 멋진 엄마로군 -하며 의식적인 자화자찬에 빠져들었다.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서도 굳이 물어본다.

"왜 그래? 무슨 생각해?"


"음.. 이따 어떤 시를 쓸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좀 다듬고 있었어"


 이런 아름다운 장면 이라니! 아이 머릿속에서 구성되고 지워지고 줄여지고 늘여지고 있을 시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내게는 그 장면 그대로 한 편의 시 같았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나도 시 한 편을 떠올려 보았다.

-


너의 시


문장을 띄워놓고,

단어를 지우고 다시 쓰고

문장을 지우고 다시 쓴다

네가 바라보는 허공엔

단어들이 뛰어놀고 집을 짓고

밥을 먹고 헤어지고 결혼하고

.....

 시를 떠올리다가 민망해서 얼른 지워버린다.

나는 시를 이해하는 것에도 쓰는 것에도 소질이 없는 인간. 아이가 시를 쓰는 모습을 보며 못다 한 꿈을 이룬 듯 대리만족을 누리고 있다는 점을 이쯤에서 고백해본다. 이번 용돈 협상은 , 사실은 90%는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였다는 사실도.

(그런데 결국에 아이도 좋아하고 교육적이기까지 하니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린 스스로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

-


 아이의 시는 어떨 때는 재미있고, 어떨 때는 기발하고. 대부분은 숙제하기 싫은 초등학생의 애환을 담고 있다. 이쯤 해서 그 애환을 농축해서 담아서, 내게 무려 1500원의 원고료를 지불하게 한 시를 공개해본다.

제목을 배반하는 절묘한 마지막 문장

  

어떤 날은 500원, 대부분의 날에는 1000원, 잘 쓴 날에는 1500원씩 - 나에게 시를 열심히 팔았다. 이제 곧 지불해야 할 누적된 원고료는 어느새 4만 원이 넘었다.

 빨리 십만 원을 모아서 어항도 사고 물고기도 더 키우고 싶은 아이는 마음이 급하기만 하다.


" 엄마. 내가 진짜 진짜 멋진 시를 쓰면 한 번에 이천 원도 주고 오천 원도 주고 그럴 수도 있는 거야?"


" 당연하지! 진짜 좋은 시에는 만원도 줄 수 있고 오만 원도 줄 수 있고 그런 거지!"


 내 대답을 들은 후에는, 더욱더 고심해서 시를 쓴다. 타자기 앞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는 시간도 길어진다. 애석하게도 아직까지는 내게 1500원 이상의 원고료를 받아간 적은 없지만,  타자기 앞에 앉아 생각을 하고 타닥타닥 타자기를 치고 설레는 표정으로 나에게 종이를 내미는 것, 이 모든 장면이 내게는 그 어떤 시 보다 아름답다.

 그러므로 아이에게는 아직 비밀이지만 원고료를

지급하는 날 , 아이가 번 만큼의 돈을 더 얹어 줄 계획이다. 그전까지는 아이가 이천 원짜리 오천 원짜리만 원짜리 시를 쓰기 위해서 고심하는 뒷모습을 만끽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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