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라구요.
에너지 총량의 법칙에 이어, 이번에는 걱정 총량의 법칙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는 문장으로
마치 계획한 듯 앞의 글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지만, 사실 앞의 이야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그 정도로 계획적인 인간이 아니므로...
이 법칙에 대한 발견? 고찰? 은 아이와의 우연한 대화로 시작되었다. 차 안에서 시작된 그 대화는, 아이가 '엄마 나는 왜 이리 걱정이 많을까. 안 하고 싶은데 이런 것도 걱정이고 저런 것도 걱정이고..' 대략 이런 내용으로 이어져 가고 있었다. 뭘 그리 걱정을 하니.. 걱정하지 마라.. 운전하면서 반쯤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는데 아이가 정색을 하며,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걱정이 맨날 떠오르는 걸 어떡해!'라고 버럭 짜증을 냈다.
차를 주차하고, 뒷좌석에 앉은 아이를 보며 솔. 직. 한 고백을 시작했다.
- 다 알아. 사실 엄마도 걱정 엄. 청. 많.이. 해.
나는 누구나 아는 까칠하고 예민하고 생각도 많고 불만도 많고 복잡하고 어려운 사람인데 그동안 아이 앞에서는 안 그런 척, 쿨한 척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토닥토닥. 자 이제 다 내려놓자.
- 저엉마알?!!
아이가 생각보다 크게 놀란다.
아무리 내가 열심히 아닌 척했다고 해도, 분명 어느 정도는 자기 엄마가 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겠지 했는데, 어머나 내가 쿨한 척을 너무 잘한 것인지 아이가 둔한 것인지 , 아이의 반응에 나도 놀랐다.
- 그러엄.. 엄마 사실, 진짜 진짜 걱정 많이 해. 하루 종일 걱정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도 걱정하고, 지나간 일도 걱정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도 미리 걱정해. 티 안 났어?
-응! 엄마 걱정 별로 안 하는 사람 같아.
-음.. 엄마는 네가 친구와 다퉜다고 그러면, 그 친구는 왜 그럴까.. 그 친구가 밉다..부터 시작해서, 내가 가서 혼내줄까, 아니야 그러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지, 다시 우리 딸 친구로 태어나서 평생 좋은 친구 해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별의별 생각을 다해. 그런데 엄마가 그런 생각을 너한테 보여주면, 너까지 엄마 걱정에 전염돼서 안 해도 될 걱정을 하게 될까 봐 정말 꾹꾹 참는 거야.
- 그래에?? 내가 그런 말 할 때마다 엄마가 그 정도로 걱정하는지 정말 몰랐는데..
아이는 나를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새로운 사람의 신분으로 아이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걱정하는 안걱정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취미도 걱정 특기도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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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걱정도 많은데 그마저도 몰입해서 해버리는, 소모적인 걱정 쟁이이다. 어떤 걱정의 씨앗이 머리에 심어지면, 그것이 잡초처럼 뿌리를 깊고 튼튼하게 내릴 수 있도록 자양분을 미친 듯이 제공하는 산발의 정신 나간 정원사 같은 나. 적당히 걱정하다가- 에이 어떻게든 되겠지-라던지, 다 잘될 거야-같은 말로 스스로를 워워 진정시킬 줄 아는 요령 같은 것도 없다. 걱정에 '꽂히면' 그 걱정을 다각도로, 끝까지 다 곱씹어야 비로소 그 걱정에서 탈출할 수 있는 '걱정 완벽주의자'이다.
걱정에 꽂혀서 모든 마디와 지방과 살과 뼈를 다 곱씹는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면, 걱정에 빠진 나를 관찰하면 된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 우리 첫째 고양이가 아파서 병원에 데려 간 적이 있다. 피검사 결과, 염증 수치가 말도 안 되게 높았고 처음 들어보는 CK수치는 너무 높아서 숫자로 환산이 안 되는 정도였다. 수의사 선생님은 일단 고열을 내리기 위해 반나절 정도 입원을 시키면서 수액을 맞혀보자고 하였고 다른 피검사와 검사들을 해보겠다고 했다. 나중에 다시 고양이를 데리러 올 때 즈음에 (다섯 시간 후에)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병명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며. 병원을 나설 때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다섯 시간 동안 내가 미친 듯이 걱정에 몰입하리라는 것을.
집에 오자마자,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첫째 고양이의 증상과 염증 수치, CK 지수에 대해서. 그 뒤엔 집에 있던 고양이 질병에 관한 책을 펼쳐서 샅샅이 다시 읽어보았다. 그 후엔 주변에 고양이를 키우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해서 물어봤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유명한 고양이 카페에 구구절절한 글을 남겼다. '괜찮을 거예요. 곧 다시 아이 데리러 가실 테니, 마음 편히 가지세요' 같은 덧글들만 달렸다.
몇 시간 뒤면 결과를 알게 될 텐데, 그럼에도 나는 왜 '마음을 편히 가지거나' '다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자책을 하면서도 나는 계속 걱정을 하고 검색을 하고 연락을 하면서 나의 걱정의 끝을 향해 돌진했다. 걱정의 끝에는 '복막염'이라던지 '급성 신부전' 같은 무서운 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병들의 치료법에는 무엇이 있는지, 치료비는 대략 얼마가 드는지, 예후는 어떤지-에 대해 의학용어까지 찾아가며 공부한 뒤에야..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하여, 다시 병원으로 고양이를 데리러 갔을 즈음에는, 세상 평화롭고 여유로운 미소까지 띠고서 갔으니 수의사 선생님이 보시기엔 참 느긋한 보호자였을 터이다.
(결론은, 고양이는 뭔가 잘못 먹었는지 급성 장염이었고, 지금은 건강을 되찾아서 잘 지냅니다!)
걱정한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바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내가 걱정을 하는 이유는, 나는 내게 주어진 만큼의 걱정을 불태워야 평화가 찾아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다.
주어진 에너지 총량은 작으면서, 걱정의 총량은 더럽게 크다! 그 부족한 에너지로 걱정을 활활 태워서 총량을 채우려면, 최대한 집약해서 걱정을 해야 한다. 집약해서 집요하게.
그나마 정말 다행인 것은, 그 걱정의 총량이 채워지고 나면, 소심함이 사라지고 제법 대범하고 평화로운 사람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걱정을 애매한 지점에서 마무리하게 되면. 나는 소심한 사람으로 남고 만다. 이제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인지하고 있어서, 걱정을 할만한 상황이 닥치면 '걱정하지 말자, 다 잘될 거야' 라며 애매하게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 이제부터 걱정을 활활 불태워보자!' 라며 걱정을 열정적으로 끌어안아버린다. 갈 수 있는 끝까지 최대한 빨리 달려가 보자.
(그러고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심함은 걱정을 애매하게 함으로써-걱정에 머무르게 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답답한 상태의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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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일에 관한 걱정은, 다른 것에 대한 걱정보다 더 집착하게 된다. 일단,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고, 내가 직접적으로 상황을 낫게 하기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걱정밖에 없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부당하게 자기를 혼내서 억울했다던지, A양이 일부러 자기만 빼고 친구들과 게임을 했다던지, 누가 자기를 놀렸다던지 -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즉각적으로 우아하고 지혜롭게 '어머 속상했겠다. 하지만 그 아이도 이유가 있겠지.' 라던지 '그렇게 놀리는 아이는 그냥 같이 안 놀면 돼~'같은 쿨한 대답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활활 타오른다. 정말 늘어놓기에도 창피하고 지질한 생각을 하면서. ( 내가 그 꼬맹이를 찾아가서, 너 다시 한번만 내 딸 놀리면 혼날줄 알아- 이렇게 겁이라도 주고 올까. 어우 선생님은 왜 그러는 거야. 그러다가 우리 딸이 학교 생활을 싫어하게 되거나 트라우마가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지. 그 A양은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다시는 같이 못 놀게 하고 싶다. 가서 꿀밥이라도 놔줄까 아니면 담임한테 전화해서 고자질이라도 할까.. 같은 절대로 실천으로 옮기지 않을 , 그리고 어른답지 못한 생각들에 치열하게 몰입한다) 이제는 그러한 걱정에도 요령이 생겨서, 압축해서 몇 분 안에 다 해치워버린다. 그리고 그 후엔 평화롭고 인자한 말투로 이런 조언들을 해준다.(그러므로 대답에 몇 분의 지연이 생기고 만다)
'속상했겠다. 근데 그 친구도 뭔가 속상한 일이 있었다거나, 이유가 있었겠지. 원래 착한 친구잖아 ^ ^'
'선생님은 여러 명의 학생을 한 번에 보셔야 하니까.. 그래서 가끔 그런 오해도 하고 그러실 수도 있어. '
아니면, 뭐 조금 쿨한 톤으로
'에잇. 그냥 다른 친구랑 놀아버렷~' 이라고 대답해준다. 저 단순한 문장들 뒤로 백 마디의 걱정이 따라붙는 것을 쏘옥 숨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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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엄마는 이런이런 걱정을 하고 이런 생각을 하고, 고해성사를 하듯이 아이에게 그동안의 나의 고민의 역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이는 그런 내가 너무 새롭고 신기한지 몇 번이나
-와 진짜? 반문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즈음에 했던 말도 다 비슷한 연장선상의 말이 아니었나 싶다.
'난 엄마 성격이 좋아. 엄마 성격은 이렇게 똑바로 서있거든.'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니 아이가 이렇게 설명을 했다.
'음... 누구네 엄마는 너무 걱정이 많아서 이렇게 한쪽으로 기울어져있고, 누구네 엄마는 너무 신나기만 해서 다른 쪽으로 기울어져있고. 근데 엄마는 중간이야. 나무처럼 중간에 딱 서 있어.'
아이가 보기에 나는, 너무 느긋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걱정이 많지도 않은 그런 사람인가 보다. 와 얘가 나를 정말 단단히 오해.. 하고 있었다기보다는, 내가 정말로 너무 연기를 잘한 것 같다. 사실 나는 정말 정말 걱정이 많다가 갑자기 극적으로 느긋해지는 사람인데. 중간에 서있기는 커녕, 좌우로 요동을 치는 바람인형 같은 존재인데.
- 엄마도 어릴 때부터 그랬어. 걱정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걱정이 떠오르고, 엄마 마음대로 안되는 거야.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데 할머니는 '일부러 걱정을 사서 하지 마라'라고 그랬지. 그게 늘 억울했어. 뭐든지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도, 생각이 많은 것도 걱정이 많은 것도 , 하나도 '일부러'하는 게 없는데 말이야. 그래서 걱정하고 싶지 않은데도 자꾸만 걱정이 떠오르는 마음을 잘 알아.
그냥 계속 그런 사람인척.. 연기를 했어야 했나, 엄마가 이렇게도 소심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아이를 불안하게 하지는 않을까.. 후회와 걱정이 밀려올 즈음에, 아이가 만족한 듯 우리의 대화에 결론을 내려주었다.
- 난 엄마도 그렇게 걱정을 많이 하는지 몰랐어. 그러면 난 엄마를 닮았구나?
아이는 자기의 걱정 많고 생각 많음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일까. 아니면, 정말 어른인 줄 알았던 엄마도 사실은 걱정이 많은 자기와 다른 바가 없다는 것에서 동질감을 느낀 것일까. 뭐 어찌 되었든 아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의 고백이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엄마만큼의 걱정 쟁이는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엄마만큼 생각이 많고 복잡하고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고, 엄마보다 더 무던해서 친구도 많았으면 좋겠고, 그런데 그 와중에도 자기중심은 있었으면 좋겠고.. 아니다 좀 까다롭고 예민한 것은 괜찮기는 하니 그러한 자질은 늘 간직했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친구를 사귀기 어려우려나. 예민한 사람에게는 어떤 직업이 어울리지? 그런 기질을 예술로 풀어줘야 하나.. 그런데 예술하면 나중에 고생하는데( 본인이 미술 전공인입니다)..
이런.. 다시 또 걱정에 빠졌다. 한동안 걱정의 바다에서 수영을 못하는 몸으로 켁켁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치다가 돌아올게요. 내가 채워야 하는 걱정의 총량이 채워지면, 오븐에서 나는 경쾌한 '땡!' 소리가 날 거예요. 그러면 나는 소심한 반죽이 아니라, 잘 구워진 근사한 갈색의 뜨근뜨근 느긋느긋 한 빵이 되어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 부디 잘 지내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