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패배로 점철된 날이었다.
아침부터 동동 거리면서, 일을 하다가 밥을 하고, 냥아들 냥딸 안 싸우나 감시하다가 청소를 하고, 그 와중에 오는 전화들 문자들 확인하고 틈틈이 아이 간식 주고 놀아주고, 또 치우고 또 밥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고양이 합사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아이의 영어쌤 피아노쌤 음료와 간식 챙겨드리고 저녁 먹고 치우고.. 정신 차려보니 밖이 깜깜하다.
그런데도 아직 못한 것들이 떠올랐다.
꼭 하자고 다짐했던 운동도 못했고, 책도 몇 페이지 읽는 둥 마는 둥 했다. 부지런히 청소를 해도 집은 여전히 지저분하고, 일도 진척이 느리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노력하고 공부하는데도 고양이 합사마저 수월하지 못하다.
그래도 우리 딸에게는 성실했네. 오늘 하루 세끼 잘 해먹이고, 도서관 데리고 가서 필요하다는 책 대여해주고, 스케줄 놓치지 않게 신경 잘 썼다-는 사실에 오늘의 망한 기분을 다독이고 있는데 느닷없이 딸이 나타나서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 엄마!! 왜 팝콘 안 해줘?!!
라고 소리쳤다.
팝콘? 그러고 보니 아까 한 두어 시간 전에 아이가
좀 이따가 9시 정도에 팝콘 해줘-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계를 보니 이미 열 시 반이 넘었다.
- 앗 내가 깜빡했네 미안. 그런데 지금 먹기엔 너무 늦었어. 낼 학교수업도 있고 빨리 자야지.
- 아 왜~!! 나 아까부터 팝콘 먹을 기대에 숙제도 열심히 했는데! 그럼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 그러면 아까 9시에 해달라고 하지. 두세 시간 전에 얘기한걸 엄마가 어떻게 기억해.
- 말 안 해도 엄마가 기억하고 해주고 있을 줄 알았지! 빨리 지금 만들어줘. 먹고 잘 꺼야!
- 팝콘은 안 그래도 소화가 잘 안 되는 음식인데
지금 자야 할 시간에 그걸 굳이 먹고 잔다고? 그러지 말고 엄마가 낼 꼭 해줄게. 오늘은 얼른 잘 준비하자
- 그러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해줘!
- 무슨 소리야, 누가 아침부터 팝콘을 먹니?! 내일 점심 먹고 바로 해줄게.
-싫어! 점심 먹고 나서 바로 먹으면 느끼하고 배부르잖아! 낼 3시에 해줘! 딱 세시에!
아이의 불만과 분노가 까탈스러움과 예민함으로 변이되어 번져나간다. 아침에는 먹을 수 있는데 점심 먹은 직후는 또 안되고 굳이 딱 오후 3시에 먹겠다는 것은 무슨 심보인가. 그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우는 것으로 자신의 통제력을 느끼고 싶은 걸까.
내 control issue를 아이에게 고스란히 물려준 것 같아 아득함을 느끼면서, 당장 가서 잘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아이가 투덜투덜 쿵쿵 언짢은 티를 온몸으로 내며 잘 준비를 하러 가자 , 남은 설거지를 하면서 서러움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분노의 설거지가 시작된 것이다. 일 년에 열 번 정도 찾아오는 분노의 설거지.
하루 종일 자길 위해서 내가 얼마나 동동 거리면서 고생했는데 그 팝콘 하나 잊어버렸다고 나를 이토록 나쁜 엄마 취급하다니 너무한 거 아냐?!! 이제 열한 살인데 왜 아직도 저렇게 아기처럼 이기적인 거지? 내가 하루 종일 얼마나 바쁜지 자기도 보면 알 텐데! 또 무슨 내일 딱 세시에 팝콘을 해달래?! 내가 하루 종일 자기 팝콘 해주는 것만 신경 쓰고 있어야 하나!
분노의 설거지가 절정에 다다를 때즈음, 잘 준비를 다 마친 딸이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엄마 나 이제 잘게!라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 그 순간 설거지로 씻겨 내려가던 분노가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며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자러 들어가려던 아이를 붙잡고, 뜨거운 말들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야 엄마가 하루 종일 얼마나 바쁜지 봤지? 대부분 다 너 때문에 바쁜 거잖아. 그리고 고양이들 때문에 요즘 나 정말 신경 많이 쓰고 있는 것도 알잖아. 너 합사가 계속 잘 안돼서 모두가 스트레스받았으면 좋겠어? 둘째 고양이 데리고 온 것도 너 때문이고, 엄마가 그것 때문에 신경 쓸 곳이 많아지는 것도 괜찮다며? 응? 엄마는 그냥 너무너무 신경 쓸게 많은데, 그 와중에 너랑 안 놀아준 것도 아니고 해 줄 거 다 해줬잖아. 그런데 그 팝콘 하나 잊어버렸다고 엄마를 죄인 취급하면 어떡해!!!
한바탕 쏟아붓고 나니 아이가 눈물을 흘린다.
미안한 마음에, 엄마가 내일 꼭 팝콘 해줄게. 그러니까 울지 마-라고 말하려는데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 렌즈에 먼지 들어갔어.
(드림렌즈를 끼는 아이는, 렌즈를 낀 채로 가끔 눈에 먼지가 들어가면 저렇게 눈물을 흘린다)
이 녀석.. 렌즈 때문에 운 거였어..
미안한 마음이 다시 쏙 들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렌즈를 다시 세척해서 껴주고 잘 자- 건조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
불 꺼진 아이의 방을 보면서 거실에 앉아,
내가 혹시 아이를 너무 어리광쟁이로 키우고 있나,
쟤는 왜 그렇게 팝콘 하나에 삐지고 그러는 거야.. 회의에 빠져 들었다. 그런데 문득, 오늘 하루 종일 아이가 뭘 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 수업을 하고 밥을 먹고 영어수업을 받고 도서관에 가고 피아노 수업을 하고-아이의 스케줄은 알겠는데 아이가 무슨 말을 했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아까 뭔가를 얘기하면서 신나 했는데.. 뭐였지?
나한테 계속 이것 좀 보라며 불렀는데.. 그게 뭐였지?
두둥-
팝콘은 나의 자기에 대한 관심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
.
라는 거창한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아이에게 팝콘은 그저 팝콘일 것이다. 오로지 팝콘 때문에 삐진 것일 수도, 또는 팝콘 때문에 쌓인 불만이 폭발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정말로 관심의 상징인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팝콘이 나의 죄책감을 건드렸다는 점이다. 못해준 팝콘 때문에, 오늘 하루 종일 잘해준 것보다 못해준 것이 줄줄이 떠올랐다.
때로는 죄책감도 도움이 된다- 미안한 마음의 결과가 개선을 하려는 의지라면. 하지만 내 마음대로 랜덤 한 것들에 의미부여를 하고 맥락을 만들다가 생겨버린 죄책감은 쓸데없이 나를 비장하게 만들어 버린다. 비장함은 정말로 그것이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대체로 모든 것을 힘들게 만든다. 특히 육아- 오죽하면 오은영 박사님도 육아를 '비장한'마음으로 하지 말라고 했겠는가.
비장한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몸을 가볍게 털고 일어나서 부엌으로 향했다. 찬장을 여니 그 안에 미처 해주지 못한 팝콘 봉지가 납작하게 눌려있다. 납작하게 눌린 게 마치 지금의 나 같군. 생각하며 팝콘 봉지를 전자레인지 앞에 놓았다. 잊지 않기 위해서.
이제부터 정말 더 좋은 엄마가 되겠어!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 비장한 다짐을 지우고 내일은 잊지 않고 꼭 팝콘을 해주겠어!라고 썼다.
그래도 우울한 표정으로 잠든 아이가 계속 떠올랐다. 우린 여간 해서는 서로에게 화난 채로 잠들지 않는다. 그게 우리의 규칙이다.
방에 가보니 아이는 이미 잠들었다. 아이 곁으로 가서 이마를 쓰다듬으니 아이가 슬쩍 눈을 뜬다.
음... 왜?
있잖아, 엄마가 내일은 더 노력할게. 더 잘해볼게
아이는 내 대답을 듣고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에 마음속 비장함이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날아가버렸다. 잘 가! 한동안 찾아오지 마!
그리고 잠들기 전에 알람을 맞췄다.
오후 3:00에-
-
비장함은 흔들리는 버스나, 놀이기구 같은 것을 타고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고 온몸에 힘을 주는 것과 같아요. 그런다고 덜 흔들리나요 - 그냥 내 근육만 아플 뿐.
그리고 비장한 사람 매력 없어요. 훌륭한 사람은 못되어도 매력 있는 사람은 되고 싶거든요. 그러니 오늘 하루도 몸에 힘빼기, 이 업엔다운 즐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