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그냥 집에 있으련다
46. 담배는 집 밖에서 더 피우고 싶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자면서도 다리가 아픈 거 같았는데, 눈을 뜨고 나니 무릎이 너무 아파 움직일 수가 없다. 이걸 경우를 대비해 등산용 스틱도 준비하고 무릎 보호대도 했다. 자기 전에 다리 이곳저곳에 파스도 붙였다. 그런데 통증이 너무 심해 움직이기 힘들다.
그래도 꾸역꾸역 움직여야한다. 서울로 가야 하니까. 그런데 대기 예약을 걸어둔 항공편이 확약되지 못했고 어떻게든 티켓을 다시 구매해야 하는 상황이다. 제주도 비행기는 워낙 많아 당일 예약도 어렵지 않았는데,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표가 없다.
어떻게든 서울로 가야 했기에 무작정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공항이 중고등학생들로 꽉 찼다. 아마도 가을 소풍 시즌인가 보다. 이 친구들이 표를 싹쓸이한 거다.
여러 항공사 발권데스크는 이미 '대기 예약 종료'다. 대기 예약은 노쇼, 급작스런 취소 티켓을 현장에서 바로 판매하는 거다. 이름을 걸어두면 비행기 시간까지 손님이 오지 않으면 그 표를 현장에서 판매한다.
대기 예약을 받는 곳이 대한항공뿐이다. 이름을 걸어두고 지리멸렬하게 기다린다. 시간이 되면 "자리가 없다. 자리 하나 있다. 다음 비행기 발표는 몇 시 몇 분에 한다. 꼭 발권 데스크 앞에 있어라. 없으면 다음 사람에게 티켓이 넘어간다"라고 말한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그리고 난 5시간 동안 공항에 있었다. 노쇼가 많기를,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핸드폰으로 계속 티켓을 하기 위해 새로고침을 눌렀다. 오죽했으면 제주-인천 페리를 검색해 전화도 했다. 배라도 타고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운행을 안 한단다.
오늘 제주공항은 정말 난장판 또는 아수라장이었다. 중고등학생들의 재잘거림이 웅웅 거리면서 지속적으로 고막을 괴롭혔고 그 소리들이 어느 순간 4차원 세계로 이끌거나 세상과 단절시키는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게 아마도 공황증세가 아닐까 싶다. 공항에서 공황을 느낀 거다.
안 되겠다 싶었다. 공항을 벗어나야겠다 생각하고 핸드폰으로 이틀 후인 토요일 비행기를 예매하고 숙소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대한항공 발권 데스크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끌어다 놓으며 "저요. 저 여기 있어요!"
5시간의 악몽. 막연히 기다리고, 비행기표 서칭하고, 시끄러워서 귀 막고, 4차원 세계로 들어갔다가 현실 세계와 단절되고, 다리는 아프고, 배낭은 무겁고, 덥고, 땀나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니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기도 했다. 아직 난 담배를 제대로 끊지 못한 거 같기도 하다.
김포 공항에 떨어지니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것 같다. 매번 인천공항이나 김포공항에 도착하면 흡연공간부터 찾아갔는데, 이번에도 도착하자마자 담배 생각이 나기는 했다. '지금 담배 피우는 정말 맛있겠네!'
후다닥 차를 찾아 집으로 왔다. 씻고 짐정리하고 다리에 파스 붙이고 소파에 누우는 제주도 금연 여행이 마치 꿈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2박 3일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역시 집 나가면 고생이다. 이제 될 수 있으면 집에 있어야겠다. 사실 담배는 집보다는 밖에서 더 피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