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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를 넘어설 수 있을까

이야기가 있는 다큐드로잉 11

by 까칠한 서생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철이 들고 성년이 될 때까지 나는 한 인물이 대통령인 나라에서 살았다. 나의 성장기와 온전히 포개지는 그 시대는 두 개의 ‘우리’를 남겼다. 하나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계몽가요 속 ‘우리’다. 강원도 산골학교의 낡은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던 그 노래를 들으며 신이 나서 등교하던 추억이 아련하다. 다른 하나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라며 생뚱맞게 나의 탄생 목적을 규정한 <국민교육헌장> 속 ‘우리’다. 생경한 한자어로 가득해서 외계어나 마찬가지였던 그 글을 방과 후까지 남아 외우고 검사받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잘 살아보자는 ‘우리’는 물질적인 풍요를 유혹했고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띤 ‘우리’는 비뚤어진 정의를 강제했다. 그렇게 내 생애 최초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은 고스란히 두 ‘우리’에 갇혀있었다.


2.

1962년 한운사 작사 김희조 작곡으로 만들어진 <잘 살아보세>는 1970년대 새마을운동 노래와 함께 정권을 상징하는 국책가요로 널리 보급되어 불려졌다. 유신독재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고도성장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 금수나 강산 어여쁜 나라/ 한 마음으로 가꾸어 가면/ 알뜰한 살림 재미도 절로 부귀영화는 우리 것이다......” 주어가 다반사로 생략되는 게 한국어의 특징일진대, 이 가사에는 ‘우리’라는 주체가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잘 살긴 잘 살되 ‘우리’가 잘 살자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공간적으로 보면 나를 포함한 가족 친지와 이웃, 나아가 동시대인 전체로 확장될 수 있다. 시간적으로는 나와 내 가족을 중심으로 위로는 조상 아래로는 후손까지 연결될 수 있다. 우리의 외연은 이렇듯 넓디넓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구호를 들으며 살았던 당시 한국인들. 그들이 자신의 안락보다는 전체를 위해 땀 흘릴 수 있었고, 후손들의 풍요를 위해 허리띠를 졸라맬 수 있었던 데에는 이처럼 ‘우리’에 담겨있는 공동체적 결속의식이 단단히 한몫했으리라 짐작된다. 유신 독재정권은 1968년 제정한 <국민교육헌장>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우리’와 함께 ‘잘 살아야 할 우리’를 국민들의 의식을 통제하는 효과적인 이데올로기로 활용했다.


3.

대학을 마친 후 사회인이 되고 가정을 꾸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이전까지 내 삶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우리’를 전복하는 단어 하나를 만났다. 그것은 바로 ‘나’였다. “천만번을 변해도 나는 나, 이유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다.” 1990년대 벽두 어느 패션광고에 등장한 이 말은 ‘나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장엄한 선언으로 들렸다. 나는 너와 같을 수도 없거니와 우리라는 집단 속에 포함될 까닭도 없다. 내가 나 이외의 다른 존재로 여겨질 조그만 틈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높고 단단한 성역이었다.



‘나는 나’는 패션은 물론 화장품 등 개인 기호품 광고를 중심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돈다”, “내가 원하는 나”, “내 아기는 달라요”, “난 내가 만들어간다”, “내 나이 20과 2분의 1”,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 “내가 원하는 여자가 된다.”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들이 방송프로그램의 틈새마다, 신문이나 잡지의 갈피갈피마다 떠돌아다녔다.


광고카피만이 아니었다. 가요계를 뒤집어놓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곡 제목은 ‘난 알아요.’였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누군가가 나를 떠나버려야 한다는/ 그 사실을, 그 이유를/ 이제는 나도 알 수가/ 알 수가 있어요......” 안다고 하는 내용이 뭐 그리 특별한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것을 소문이나 막연한 짐작이나 누구의 전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분명한 주체가 아무런 착오도 없이 확실히 안다고 당당히 외치고 있었다.


이 수많은 ‘나’들은 자신을 차별화되는 주체로서 판단과 인식의 독립국으로 선언했다. 나아가 주변인물과 상황을 이끌어가는 종주국이며 그들을 변화시키는 진원지라고 주장했다. 이를테면 ‘나’의 능력과 역할로 제국주의적 식민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나’는 끝없는 변신욕구를 지닌 주체이기도 하고 목표이기도 했다. 어떠한 준거기준도 모두 ‘나’가 되는, 무한한 자기 복제의 연속이었다.


4.

1990년대를 유령처럼 배회한 ‘나’는 1970, 80년대라는 이념과잉과 집단문화의 굴레를 극복하고 서구적 자유주의로 나아가는 문명사적 의미도 지닌다. 하지만 이 단어가 ‘신세대’와 ‘X세대’ 그리고 ‘미시족’과 같은 새로운 소비 집단의 등장과 맥을 같이 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다른 집단과 자신을 구별 짓고 싶은 강한 자의식이 있었던 그들에게는 이를 입증할 만한 구매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단어가 주로 화장품이나 패션 등 개인 기호품 광고에서 사용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요컨대 ‘나’는 ‘X세대’와 함께 새로운 소비 집단을 끌어들이기 위해 마케팅의 먹잇감으로 포섭된 단어였다. 우리나라에서 ‘X세대’라는 단어가 화장품 광고에서 처음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세대 문화’는 1990년대 후반 IMF사태를 거치며 위력을 잃어갔다. ‘문화의 떴다방’이었거나 일시적인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윤여일은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에서, “신세대의 문화는 탈권위주의 의식으로 모든 위계와 특권을 거부하는 듯하지만, 이러한 카니발적 의식은 제도화된 소비문화의 문법을 벗어나지 못하며 신세대론 자체가 내부의 차이를 균질화하고 사회적 갈등들(계급, 경제, 지역, 민족 등)을 가리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유발한다.”라고 지적한 다음, “(나를 강조하는) 소위 신세대식 광고 카피들은 젊은 세대의 소비를 부추겼다. ‘나’ 타령의 광고는 이전까지의 사회적 억압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개성, 감성, 자유 같은 젊음의 어휘를, 이윽고 일탈, 해방, 혁명 같은 정치적 어휘를 되는 대로 긁어모아 상품을 치장하고, 그러면서 체제에 ‘탈정치화’라는 부수물을 진상했다.”라고 평가했다.


5.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자신의 정의론으로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를 제시했다. 이는 공동체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방안을 모색한 끝에 찾아낸 대안이었다. 쉽게 말하면 ‘나’와 ‘우리’를 조화시키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로 상징되는 자유주의와 ‘우리’로 상징되는 공동체주의의 장점만을 화학적으로 또는 생태적으로 결합하여 하나로 엮자는 말이다. 샌델은 이렇게 정리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나’의 주체의식은 ‘우리’의 연대의식과 만날 때 긍정의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샌델이 말하는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의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나’의 이기심과 ‘우리’의 배타성이 만나면 세상은 지옥이 된다. 그런데 왠지 어느 광장에서 아니면 누군가의 밀실에서 그렇게 끔찍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서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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