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 허무를 견딘 자의 영광>
HOLSE의 소제목은 YOU ARE ENTERING CAMP GREEN LAKE로 시작한다. 그러나 다음 문장은 There is no lake at Camp Green Lake! 작가는 첫 문장을 통해 독자들에게 허무를 예고한다.
엘리아는 세 번의 허무를 겪는다. 마담제로니가 제안한 돼지 안고 산오르기. 처음엔 ‘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지만 매일 산 오르기를 반복했다. 두 달 후 튼실해진 돼지를 마이라에게 데리고 가 결혼할 기회를 얻지만, 사랑이라고 확신했던 그의 믿음은 한순간에 무너진다. 미국에서 쎄라를 만나게 되지만 그녀와 함께 사는 동안 벼락을 세 번이나 맞는다.
마담제로니는 왼쪽 발목이 잘려 휠체어에 앉아있다. 이유는 언급되지 않지만, 노예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도주했던 노예가 잡히면 발목을 잘랐다고 한다. 마담제로니가 탈출을 감행하기까지의 고통과 그 실패로 멀쩡한 발목이 잘려나가는 폭력 앞에 마담제로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 느닷없는 상실의 허무를 어떻게 견뎠을까?
마담제로니의 세대를 거슬러 6대 손자 지로의 허무를 보자. 엄마와 노숙자 생활을 하다 어릴 때 엄마를 잃었다. 영문도 모른 채 홀로 남겨진 지로... 극한의 불행 앞에 인간이 종종 그렇듯 지로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그는 스탠리에게 엄마가 사라진 동안 ‘재피’라는 기린 인형을 껴안고 있었고, 나중엔 잃어버렸다고 했다. 스탠리가 인형을 찾았냐고 묻자 지로는 한참 있다 ‘재피’는 지어낸 것이라고 말한다. 캠프 아이들도 상냥한 말씨로 위장한 팬댄스키를 ‘엄마’라며 따른 것이 현실을 견디기 위해 환상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로만 유일하게 팬댄스키를 경계하며 따르지 않았다. 지로는 이런저런 불행을 온몸으로 겪으며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직관을 갖게 되었다. 지로의 110년 전 조상 마담제로니처럼 말이다.
우리는 인물들을 통해 다양한 허무를 겪는다.
1. 목표를 향한 과정의 허무 - 돼지 안고 산 오르기와 지로 안고 산 오르기, 스탠리 아빠의 실험이다.
이 허무는 처음엔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반복한다. 이 변화는 너무나 미묘하고 잘 보이지 않아 제자리인 것처럼 무의미해 보이지만 인내심과 시간을 통해 의미를 깨닫고 목표를 완수한다.
2. 인식의 실패로 인한 허무 – 스탠리는 마이라가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 의미를 부여하지만, 구애의 순간 그 의미가 비어 있음을 깨닫는다. 다정한 말씨의 팬댄스키 선생이 가장 좋은 선생님인것같아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를 만큼 그를 따른다. 그러나 결말부분에서 그가 가장 잔인한 인물임이 드러난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말에 도취되어 대상에 의미를 채우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 의미가 허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3. 무자비한 파괴력으로 덮치는 세계에 대한 허무
- 권력이 만들어 놓은 부당한 법에 의한 허무 : 캐서린과 마담제로니, 스탠리의 허무
- 우연한 시공간에서 발생한 허무 : 엘리아의 벼락, 스탠리의 하늘에서 신발 받기, 지로의 허무
캐서린은 ‘천사의 음식’인 복숭아잼을 만들어 나누고 무지한 마을 사람들에게 그녀의 지식을 베푼다. 그녀가 사랑한 샘도 양파로 만든 즙과 손재주로 몸이든 물건이든 고장 난 것을 고쳐준다. 마을에 선한 영향력을 베풀던 그들이었건만 흑인이 백인을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샘은 죽임을 당한다. 그녀 생의 가장 큰 의미와 가치인 사랑의 감정은 부당한 법에 의해 ‘악’이 되고 마는 납득할 수 없는 허무의 벼락을 맞는다. 캐서린은 이 텅 빈 허무를 채우기 위해 자신의 키스를 ‘죽음의 키스’라는 의미로 채워 복수하지만, 이 허무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았다.
엘리아는 미국에서 세라를 만나 사는 동안 벼락을 세 번이나 맞는다. 자신이 저주를 받아 생긴 일이니 떠나라고 하지만 세라는 그 불운을 껴안고 그와 함께한다. 그는 불운을 통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무자비한 파괴력으로 덮치는 세계에 대한 허무는 인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허무일 것이다. 이 부당함을 해명하고 싶어도 그 시대의 법은 자명함의 오류에 빠져 개인이 상대하기에 너무도 무력하다. 자연재해는 또 어떠한가. 도대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당해야 하는 허무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허무의 단상들을 수많은 구덩이의 이미지를 통해 가시화한다. 구덩이의 수만큼 개인의 인생마다 다양한 허무를 펼치며 인간은 무의미와 허무 앞에 던져질 때 가장 취약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의미를 몹시 견디기 힘들어 한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개념을 일년, 사계절로, 다시 한달 초 단위로 나눠 가시화해야만 안정을 찾는 본능이 있나 보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선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하니 우린 가시화 된 오류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쫒아 섣불리 의미를 채우지 말고, 보이지 않는 세계, 무의미와 허무의 시간은 비어 있지 않다고, 그 텅빈 허무의 의미를 지금 당장은 알수없지만 결국엔 충만한 의미를 찾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로니가문은 허무를 견디며 사람의 내면을 읽어내는 직관과 지혜를, 스탠리가문은 대대로 엄청난 불운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실패에서 배운다’고 말하는 내공을 얻게 되었다. 이들이 허무의 어둡고 긴 터널을 견뎌낸 것은 그들의 허무를 어루만지는 자장가와 그들 곁을 지켜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무엇보다 무의미와 허무를 견딘 이들의 가장 큰 영광은
그들만이 누군가의 허무의 사태를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그들을 구원할수 있다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