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더 늦기 전에 생각의 틀을 리셋하라
“나는 신발이 없다고 울었다.
발이 없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 고대 페르시아 격언 —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현실이 너무 버거울 때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품기 쉽습니다.
‘언제나 나만 힘들다’, ‘내가 제일 힘들다’, ‘나의 고통이 가장 크다’라고 말이죠.
저 역시 저의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무겁다고 느낀 적이 있어요.
주변 사람들은 뭐든 신나고 행복하게 해내는데, 나만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고 여겼죠.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소셜미디어의 영향입니다.
소셜미디어에는 사람들의 ‘하이라이트 신’만 올라와요.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성공한 순간만 그럴듯하게 포장되고 가공되어 노출되죠.
우리는 그런 남의 화려한 겉모습과 나의 초라한 ‘비하인드 신’을 비교합니다.
결국 남의 베스트와 나의 워스트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꼴이죠.
오늘도 소셜미디어를 보며 왠지 모를 우울감과 슬픔에 빠져들지 않았는지 한번 되돌아보세요.
왜곡되고 과장된 모습을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였다가는 우울하고 슬퍼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소셜미디어 문해력을 길러야 합니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다
스웨덴 출신의 작가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네가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친절하라, 그 어느 때라도.”
이 말이 진짜입니다.
제가 아는 한 지인은 겉보기에 늘 밝고 활기찼습니다.
남들은 그를 보며 부러워했고, 삶의 고민이 전혀 없을 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우울증이 있었고, 가족 문제로 인해 홀로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습니다.
미국 예일대 의과대학 나종호 교수의 말이 떠오르더군요.
“완벽한 비단결처럼 보이는 사람의 인생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누더기를 겹겹이 덧댄 것과 같구나.”
모두가 자신의 인생에서 각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마음속에 무거운 돌 하나씩 안고 살아가요. 예외란 없습니다.
돌의 크기, 개수와는 상관없이 각자의 돌이 가장 무겁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고통만 바라보다가 다른 사람이 짊어진 고통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이 겪는 일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테지만,
사실 고통이란 결코 비교될 수 없습니다.
어느 글에서 이런 비유를 본 적이 있습니다.
“바늘로 코끼리를 찌르면 그저 따끔거리지만 개미에겐 치명적이고,
높은 빌딩에서 떨어져도 개미는 무사하지만 코끼리는 죽는다.”
고통과 슬픔도 이와 같습니다.
타자의 슬픔을 자신의 기준으로 재단하지 마세요.
사람마다 느끼는 아픔의 크기와 무게는 다 달라요.
아무리 작은 일 같아 보여도 누군가에게는 견디기 힘든 큰 슬픔일 수 있습니다.
<슬픔의 나무> 라는 우화 하나를 소개할게요.
사람이 죽으면 하늘나라에 있는 커다란 슬픔의 나무 밑으로 갑니다.
나뭇가지에 자신이 겪은 고통과 불행을 걸어 놓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비교해 볼 수 있죠.
마음에 드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선택하고 떠난다고 합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결국 자신의 고통이 가장 견딜 만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죠.
모두가 자기만의 무게를 안고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겉으론 행복해 보이고 멀쩡해 보여도, 모두가 ‘아주 정상적인 아픈 사람들’이죠.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힘든 만큼 남들도 힘들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는 있어요.
내가 힘들 때,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상대에게 친절을 베푸세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사람을 웃게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결국 그 작은 친절이 돌고 돌아 나를 구할 수도 있어요.
이제부터 ‘나만 힘들다’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이렇게 말해 보세요.
“모두가 각자의 전투를 치르고 있다. 그러니 서로 조금 더 친절하고 다정하게 살아가자.”
세상에는 내가 겪지 못한 다양한 아픔과 상처를 품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만의 고통에서 벗어나 타인을 향해 손을 내밀어 보세요.
삶이라는 전쟁터가 한결 더 견딜 만하게 느껴질 겁니다.
- <마흔 더 늦기 전에 생각의 틀을 리셋하라>, 박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