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 해? 말아!’ 이 고민을 몇 달째하고 있다. 참고 기다리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보고 있으면 입이 자꾸만 씰룩거리니 안 보고 못 본 척 외면하며 고구마를 삶았다. 예전 같으면 진작에 잔소리를 하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재미난학교는 스스로 배움을 강조한다. 좀 어려운 말로 아이들의 ‘행위 주체성’이라고 했다. 재미난학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대안교육기관들이 강조하고 공유하는 개념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배움을 시작했을 때 배움에 흥미가 생기고, 온전히 자기 것이 된다고 했다. 격하게 공감하는 부분이다.
이 분야를 연구한 로저하트의 ‘학생 참여 계단 모델’에 의하면 아이들의 행위 주체성을 8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가장 높은 단계에 해당하는 7단계는 ‘아이가 주도하고 어른이 관리 감독하는 단계’이고, 8단계는 ‘아이가 주도하고 어른에게 결과만 공유하는 단계’다. 7단계까지는 이해가 갔지만 8단계에서 ‘이게 가능하긴 한 건가?’ 하는 생각과 ‘부모가 할 수 있는 역할이란 게 과연 무엇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만약 아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는 날이 계속되어도, 그때도 마냥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특히 ‘결정적 시기’라는 타이밍이 매우 중요한 순간들도 있다고 하는데 말이다. 부모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더 어렵기만 했다.
아이는 학교에서 행위 주체성이란 개념을 배우고 난 뒤 비밀로 부치는 게 많아졌다. 이런 건 스펀지처럼 참 흡수가 빠르다! 집에서 과제를 하는 모습도 달라졌다. 컴퓨터로 무언가를 하다가도, 가끔 한번 들여다보려 하면 귀신처럼 알아차리고 노트북을 빛의 속도로 닫는다. 안 보여준다. 괘씸하기까지 하다. 나도 안 보려 했다. 슬쩍슬쩍 훔쳐봤을 때 이런저런 부분을 좀 보완하면 좋으련만. 행위 주체성을 생각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런 나의 고민을 알기라도 하듯 재미난학교 20주년 행사로 포럼이 열렸다. 3곳의 대안학교가 연합으로 아이들의 행위 주체성을 주제로 발표했다. 생각보다 꽉꽉 들어찬 학부모들을 보며,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에 약간의 안도와 동지애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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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의 개인 프로젝트는 디폼블록으로 세계의 랜드마크 건축물 만들기다. 이 과정 속에는 전문가와의 만남도 있다. 소개를 받던 스스로 발품을 팔던 그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 조언도 듣고, 경험을 더 확장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아이는 여기서 막혔다. 3월에 시작한 프로젝트가 6월이 끝나가도록 전문가를 만나지 못했다. 친구들이 음악, 일러스트, 요리, 조류 탐구 등등 자신이 정한 프로젝트에서 전문가를 만나고 도움을 받는 동안 아이는 오직 혼자서 건축물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자 나의 갈등이 차곡차곡 마천루를 쌓아갔고, 3개월에 다다르자 이윽고 내 입이 터지고 말았다.
아이가 전문가를 만나지 않는 이유는 전문가가 없다는 것이었다. 유튜브까지도 찾아봤지만 열쇠고리 같은 작은 모형을 만드는 사람은 있어도 자기처럼 큰 건축물을 만드는 전문가는 없다는 것이다. 또 레고블록으로 건축물을 만드는 사람은 있지만, 디폼블록이 아니기 때문에 만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한편으론 이해가 가면서도 답답했다. 나는 유튜버들에게 메일이나 댓글로 연락해 보라고 제안을 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할수록 100% 딱 원하는 전문가를 만나기란 쉽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유사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만나다 보면 분명 도움 되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줬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활 교사와 이야기해 보겠다고 했다. 웬일인지 고맙다고도 했다. 답답한 마음에 입을 뗐지만, 행위 주체성을 떠올리며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했다면 그 결과가 부족했다 하더라도 그 경험 또한 공부일 텐데, 내가 관여함으로써 그 기회를 빼앗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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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 마지막 순서인 분임토론에서 나는 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집단지성의 힘이라고 했던가.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두 가지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포럼이란 참 좋은 것인가 보다!^^). 첫 번째는 셀프 질문하기. ‘내가 지금 아이에게 하는 행위가 꼭 필요한 것인가?’ 일종의 자기 검열처럼 셀프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부모의 관여(또는 잔소리)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자기 아이를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것. 내 아이가 아닌 그냥 옆집 아이라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굳이 안 해도 될 잔소리는 조금이나마 줄어들게 될 것이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역할이란 게 있긴 하나?’ 싶었던 내 고민은 포럼을 계기로 바뀌게 되었다. 할 수 있는 게 없는 게 아니라, 훨씬 어려운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 그것은 세상 제일 어려운 잔소리를 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