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염탐
“차장님. 차장님. 빅뉴스~!”
서대리가 윤성을 보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사람처럼 나지막이 속삭였다.
“영업 강부장. 짤렸대요! 당장 내일부터 나오지 말랬대요.”
윤성은 놀라움과 황당함, 분노의 감정이 동시에 뒤섞였다.
“아니, 갑자기 웬?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니! 그게 말이 되냐?? 언제 그랬데?!!”
“오늘 주간 회의 끝나고, 곧바로 박상무가 그랬대요. 이달 말까지 퇴직 처리할 테니,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된다고.”
윤성은 기가 막혔다. 오늘 해고 통보를 하고,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니. 아무리 중소기업이고, 노동법보다 사장 심기가 우선이라지만, 해도 너무하단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지난주에도 강부장과 윤성은 소주를 한잔했었다. 별다른 일은 없어 보였고, 매출 부진 때문에 좀 힘들어 보인다 싶었는데, 하루아침에 짤리다니. 서대리는 아니꼬운 투로 말했다.
“하튼 사장한테 한번 찍히면 끝이야. 끝!”
“강부장 애도 세 명인데, 당장 돈 들어갈 데가 한두 곳이 아닐 텐데 어쩌냐?”
“그게요. 이미 작년부터 내보내려고 했는데, 계속 버티고 안 나가니 사장이 결국 박상무 시켜서 정리한 거래요. 경영관리팀에서도 면담 조로 여러 번 압박했었대요.”
“그런다고 멀쩡한 사람을 내보내? 그것도 하루아침에?”
서대리는 시니컬하게 말했다.
“이래서 직장에 충성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니깐. 결국 각자도생이야. 저는 한 방에 인생 역전해서 보란 듯이 조기 탈출할 겁니다. 차장님도 잘 생각하세요.”
“야 서대리. 너는 젊은 놈이 응? 그 코인에나 목메고 있고...”
“젊으니까 그렇죠. 이게 현실적인 거예요. 강부장 나이 먹고 갈 때 없어서, 자존심 구겨가면서 버티고 버티다 그깟 위로금 몇 푼 더 받고 결국 짤리는 것 봐요. 먹고 살길은 알아서 미리미리 챙겨 놔야 한다고요~”
서대리는 가십거리에 볼일이 끝난 듯 자리를 떠났다.
윤성은 생각했다. 강부장이 혼자였다면 저렇게까지 버티진 않았을 것이다. 가족이 있었기에 한 달이라도 더 다니고, 마지막까지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 아등바등 매달렸을 것이다. ‘이것이 희생인가? 이 희생이 부정적인 개념인가?’ 강부장뿐만 아니라 가족 누구라도 응당 그랬을 것이다.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참고 노력하며, 가족을 위해 서로가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그리고 이런 희생은 숭고한 가족애라 생각했다. 윤성은 에로프의 메시지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핸드폰 버튼을 꾹꾹 눌러가며 답했다.
“브로. 희생은 부정적 개념만 있지 않음! 희생을 따뜻한 가족애라 생각하면... 모순이 사라질 거임”
“그렇지 않습니다. 사전적 의미에도 희생은 부정적 의미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윤성은 이번엔 물러나지 않고 말했다.
“헤이 브로~ 나를 믿어! 희생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의미로도 사용됨. 내 말이 이해되면... 아마 감정을 조금은 알아가는 것일 수도 있음...”
핸드폰 화면이 전파방해를 받는 것처럼 2~3초가량 ‘치지직’ 거리다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브로를 믿어 보겠습니다.”
“ㅇㅋ”
“브로의 부모도 가족입니까?”
윤성은 에로프의 질문에 약간 황당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에로프가 왜 그렇게 질문을 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당근! 지금은 따로 사니... 편의상 같이 사는 가족만 말한 거임”
“동거 여부가 중요한 기준입니까?”
“어.. 그럴 수도 아닐 수도.. 그때그때 다름”
가족이란 형태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핵가족화, 1인 가구 시대. 시대적 변화라는 흐름 속에서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은 서서히 해체되고 있었다. 초고령화와 저출산, 인구 소멸의 위기 앞에서 가족이라는 가치관이 대 변혁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가족의 개념도 많은 변화 생김. 혼자 사는 사람도 많음. 동거인, 소수지만 동성간 결혼.. 또 ‘반려동물도 가족인가?’ 하는 논쟁도 있음”
“브로 생각은 어떻습니까?”
윤성은 비교적 최근에 반려동물을 입양하면서 가족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과거 동물은 동물일 뿐 가족과는 엄연히 다르다는 입장이었지만, 반려동물을 키우면서 서서히 그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다. 법적으로 가족이라는 기준과는 별개로 말이다.
“나는 전자였다가.. 최근 반려묘 키우며 후자로 바뀜. 만나면 으르렁대는 가족보다 같이 살면서 껌딱지처럼 붙어 잠도 자고, 얼굴도 비벼대는 울집 냥이가 더 애정감”
“그렇군요.”
“탐탁지 않게 보는 사람들도 있음. ‘사람 나고 동물 났지, 동물 나고 사람 났냐?’는 것처럼”
동물에 대한 인권(?)을 외치는 동물보호 단체와 배부른 소리 한다는 사람들의 시선들이 상호 충돌하고 갈등을 빚고 있었다. 반려 카페, 반려 호텔, 장묘 문화들이 생겨나면서 있는 자들의 과도한 사치다, 보기 불편하다는 목소리들도 공존하는 현실이다.
“그럼 브로는 반려동물을 가족이라고 생각합니까?”
“가족이 뭘까? 싶음. 얼굴 봐서 좋은 일 없는 가족은.. 안 보고 사는 게 더 낫겠다 싶을 때도 있음. 매일 곁에 있는 우리 냥이가 무지개다리 건너면 그게 더 슬플 것 같음. ㅜㅜ 사람, 동물 이전에 유대감 쌓고, 행복한 시간 보내면 그게 곧 가족이라 생각함”
“가족은 논리적으로 딱 구분하긴 어려운 개념이군요.”
“ㅇㅋ 이제 좀 말이 통하는 것 같음 ㅎㅎ”
어느새 지하철은 집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윤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데, 웬일인지 묵언수행 중인 아들 녀석에게서 카톡이 왔다.
“어디삼? 언제옴?”
퇴근이 늦어져 집에 도착 시간이 지나니, 집에서 카톡을 보낸 것이다. 티격태격하더라도 소소하게 일상을 챙겨주는 건 역시 가족이었다.
※ 이 소설은 AI와 협업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