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기 싫었던 아빠, 학교 가고 싶었던 딸
담푸스에서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났다. 일출과 함께 설산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고 해가 뜨기 시작하면 높은 봉우리부터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모든 봉우리가 햇빛에 드러나고 나면 구름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간간히 구름이 설산을 가리면서 눈앞에 어릴 때 보던 달력사진의 광경이 만들어진다. 설산의 변화를 보면서 우아하게 아침을 즐겼다. 짐을 싸고 길을 나선다. 담푸스에서 오스트레일리안 캠프까지는 고작 45분이란다. 트레킹이라기에는 짧은 거리인지라 어깨에 멘 배낭이 어제보다 가볍게 느껴진다. 사실 줄어든 것은 어제 쓴 치약과 로션 정도일 텐데 말이다. 능선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 새 오스트레일리안 캠프에 도착했다. 이 곳은 마을이라기 보단 4개 정도의 롯지(Lodge)가 있는 전망대 같은 곳이다. 어디가 제일 전망이 좋을까하고 두리번거리는 중에 넓은 마당에 커다란 그네가 있는 집을 선택했다.
커다란 그네가 있는 집에는 세 남매가 있었다. 9살이라는 누나가 7살, 6살의 남동생들과 오순도순 롯지의 레스토랑 식탁에 앉아 책을 보면서 무언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왜 학교에 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오늘이 토요일이다. 올라오는 길에 학교를 하나 보았다. 여기서 학교까지는 40분이 걸리는데도 이 아이들은 그 먼 길을 지나 매일같이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깊은 산 속에서도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는 사립이었다. 고학년은 매일 점심시간 뒤 첫 시간에 한 과목씩 시험을 봤다. 한 시간 남짓 시험을 보고 답안지를 뒤로 두 번 넘겨 바로 채점을 했다.
“이거 가르쳐 준 거잖아. 틀린 놈들 다 일어서.”
채점이 끝난 후에는 담임선생님이 한 문제씩 문제풀이와 해설을 하고, 문제마다 틀린 학생을 모두 일으켜세워 손바닥을 무자비하게 내리치셨다. 보통 25문제였으니 잘 해야 한 두 대고, 보통은 일곱여덟 대는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물론 아프기도 했지만, 친구들 앞에 서서 맞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처음 손바닥을 맞았던 초등학교 5학년 때, 나는 공부에 눈을 떴다. 손바닥을 맞고싶지 않아서 시험 전날 서점에 있는 문제집을 몽땅 사서 풀고 등교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더욱 끔찍했다. 지금은 학교 체벌이 뉴스가 되지만 예전에는 일상이었다. 중학교는 한 반에 70명, 고등학교는 한 반에 60명이던 시절이었다. 그 많은 학생들을 통솔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을 수도 있지만, 엄격하고 무서웠던 분위기 때문에 학창시절은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많다.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선생님인데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선생들이 정말 많았다. 지금의 학교가 예전 같다면 나는 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싶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은 학창시절을 보낸 것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어느 새 내가 선생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지 벌써 20년차다.
나의 학창시절이 그리 행복하지 않아서인지 내 아이들은 최대한 학교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키우고 싶었다. 대학교의 방학이 초등학교의 방학보다 이르기에 항상 내가 방학을 하자마자 아이들은 학교에 ‘자율학습신청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온가족 배낭여행을 떠났다.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세 번째 인도 배낭여행을 계획했었다. 이미 중학교 2학년이 되어버린 딸은 공부에 대한 부담때문에 데려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자유롭게 키우고 싶었지만 대학 입시를 위해서는 고등학교 입시부터 준비해야한다는 세간의 이야기를 나도 무시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미 인도 배낭여행을 가족과 함께 두 번이나 경험했던 아들은 엄마와 누나 없이 아빠와 둘만의 3주간의 장기 여행을 망설이는 듯 했다. 그러나 방학을 하기 전에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고민 없이 대답했다.
“학교 빠지고 가는 거면 갈래.”
아이들은 자라면서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집에서는 부모에게서, 학교에서는 선생님에게서 수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가치관을 형성해간다. 나의 학창시절에도 잘 살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을 가야한다며 아이들을 다그쳤는데, 4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별로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초등학교 이전의 아이들에게 까지 좋은 대학을 가려면 지금도 늦었다며 다그치고, 밤낮으로 학원을 보내고, 한글도 다 떼지 않은 아이들을 영어유치원으로 보낸다.
우연히 알게 된 어느 교수님은 아이 셋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홈스쿨링을 시키고 있다고 했다. 절대로 먼저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는데 막내 아이가 10살까지는 신나게 놀기만 하더니 어느 날 아빠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빠, 나 한글 가르쳐줘. 책 보고 싶어."
손바닥을 때리며 다그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인간에게는 배움의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그 근본적인 배움의 욕구를 채워주는 역할을 해야한다. 나는 그렇게도 가기 싫었던 학교였는데, 네팔 히말라야의 산골짜기에 있는 아이들은 매일같이 먼 길을 걸어 학교를 다니고 주말에도 스스로 책을 읽고 있다. 이 아이들은 배움의 욕구를 학교에서 채우고 있을 것만 같다.
“아빠, 저 아이들은 학교를 어디로 다닐까?”
오스트레일리안 캠프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한 롯지에는 세 남매가 있었다. 언니가 책을 들고 동생들에게 하나씩 가르쳐주는 모습이 너무나 예뻐 보였다. 올라오던 길에 보았던 학교가 딱 하나밖에 없었으니 이 동네 아이들은 그 곳으로 학교를 다닐 것이다. 내가 헉헉 거리며 몇 번이나 쉬었다 올랐다를 반복했던 길을 이 아이들은 매일같이 다닐 것을 생각하니 기특했다.
나의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공부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우연히 시작한 어린이 영어연극이 너무 재미있어 매일매일 연극하러 갈 생각에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1학년 첫 시험에서 전교에서 유일하게 체육에서 백점을 맞고는 체육선생님 칭찬을 받은 것에 신이 나서 3년 내내 미래의 체육선생님을 꿈꾸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체육선생님을 끈질기게 졸라서 학교의 작은 운동장에 핸드볼 골대를 설치했다. 점심시간마다 친구들을 끌고나가 축구를 했는데, 여중이었던 우리 학교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아빠를 따라 온 가족이 미국으로 떠날 때 나의 친구들은 미국에서 축구를 배워오라며 축구공을 선물로 줄 정도였으니 말이다.
미국에서 1년 반 동안 고등학교 생활을 하면서는 영어에 익숙해지는 것 자체가 너무 스트레스였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데 새로운 언어로 역사, 과학, 수학 등 모든 것을 배워야하는 환경이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그렇게 좋아하던 운동은 체격 좋은 미국 친구들을 따라갈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딱히 말이 필요 없는 미술이었고, 미국에 있는 내내 미술수업만 잔뜩 들었었다. 결국 돌이켜보면 나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공부'와는 참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지난 채로 귀국을 하고보니 한국의 고등학교로 편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들 대학 입시를 시작해야할 시점인데 나는 도저히 교과과정을 따라갈 수준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학교시스템에 적응하기도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대입검정고시였다. 검정고시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인터넷으로 찾은 검정고시 학원을 찾아갔다. 내 또래의 친구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내 옆자리에는 50대, 60대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이 앉아계셨다. 이미 검정고시를 재수, 3수, 4수 째 하고 있다며 수업이 끝나면 스터디까지 열심히 참여하는 분들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의 학습능력만 보여주면 되었던 검정고시가 내게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학원을 다닌 지 한 달 만에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과정을 건너뛰었다. 학원을 그만 나오겠다고 이야기 했을 때 같은 반의 아주머니들은 이렇게 말했다.
“역시 공부는 젊을 때 해야 하나봐.”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졸업했는데도 취업 원서를 쓸 때마다 나는 학력을 입력하는 칸에서 망설이게 된다. 항상 고등학교 정보를 적어야하는 칸이 있기 때문이다. 내게 대입검정고시는 이유를 설명해야하는 나만의 콤플렉스가 되었다. 다른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고등학교에서의 다양한 추억이 부러워서일까? 한때는 고등학교 교복이 너무 입고 싶어서 학생처럼 보이는 스쿨룩을 입고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끔 고등학교 때 배웠을법한 기본적인 상식에 취약한 나를 발견하게 될 때 꼭꼭 숨겨두었던 나의 콤플렉스는 다시 떠오른다. 학창시절 책을 읽고 외우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던 내가 얼마 전 다시 국사 공부를 시작했다. 글씨가 빼곡한 책과 씨름하는 것도 두렵고 선택을 강요하는 사지선다형 문제들은 더욱 무섭다. 이제야 나는 검정고시 학원에서 옆 자리에 앉아계시던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던 배움의 때를 놓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공부를 하긴 했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나 역시 공부가 죽기보다 싫었던 적도,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밤 늦게까지 학원을 돌아다녔던 기억도 존재한다. 미국에서의 짧은 고등학교 생활과 맞바꾼 건 고등학생에게만 주어지는 학창시절의 추억과 친구들, 그리고 배움이었다. 후회가 남는 것은 아니지만, 그 때이기에 배울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 네팔의 히말라야 산골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하루에 40분 이상 걸어서 등교해야하는 학교일지라도 이 아이들이 행복하게 다닐 수 있기를. 더 많은 아이들이 배움의 때를 놓치지 않고 그 때에만 만들 수 있는 추억과 배울 수 있는 지식을 충분히 쌓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