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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봉기 Nov 04. 2020

라파즈 여행

볼리비아의 수도

해발고도 3700m 고산지대에 자리한 볼리비아 수도 라파즈의 여행은 성 프란시스코 성당 앞 광장에서 시작한다. 성당 앞 광장은 청소년과 예술가들이 모여 그림을 전시하기도 하고 공연을 펼치는 라파즈 최고의 만남의 장소이다.


라파즈의 랜드마크인 성 프란시스코 성당은 라파즈가 건립되던 1548년에 건립되었으나 엄청난 눈보라에 붕괴되었다가 18세기에 와서 스페인과 남미 건축이 혼합된 바로크와 메스티소 건축 양식이 조화를 이룬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축되었다.



성당으로 들어가면 고딕식 벽돌 기둥과 천장이 우람하게 성당을 받치고 있으며 성모와 예수 그리고 성 프란시스코의 조각상이 있는 황금 제단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다.


성당에서 나와 성당 옆으로  가파른 골목길을 오르면 여행자 거리가 시작된다.



이곳에 여행사와 호텔 그리고 식당과 환전소가 늘어서 있으며 이는 다시 다양한 가게와 기념품 상점으로 이어진다. 특히 라마 털로 만들은 질 좋은 스웨터나 티셔츠를 파는 가게가 여행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다.


여행자 거리를 지나면 마녀 시장이 나온다.



마녀 시장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초와 부정을 막는 부적 등을 팔기 시작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도 각종 주술 용품과 부적 그리고 말린 토끼 등을 판매하고 있다. 이 재료들은 산악지대에 사는 원주민들이 대지의 신 파차마마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다. 특히 새 집을 지을 때 새끼 라마를 마당에 묻으면 행운이 온다는 믿음 때문에 지금도 가게마다 말린 새끼 라마를 전시하고 있다.



다시 성 프란시스코 광장으로 돌아와 큰길을 건너면 라파즈에서 제일 번화한 코메오 거리가 나온다. 이 곳 역시 식당과 가게 그리고 수많은 인파로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코메오 거리를 지나면 무리요 광장이 나타난다.



이 곳은 원래 아르마스 광장으로 불렸지만 스페인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하다가 이 광장에서 교수형을 당한 페드로 도밍고 무리요를 추모하기 위해 지금은 무리요 광장으로 부른다. 광장 중심에 무리요 동상을 세워져 있으며 그 주위로 대통령궁과 국회의사당 그리고 대성당 등 화려한 건물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다.


무리요 광장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볼리비아를 대표하는 화가 마마니 마마니의 작품 전시장이 나온다.



전시장에는 그의 탄생과 작품에 관한 해설 책과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인디오로 태어난 그는 인디오의 비전과 느낌 그리고 안데스의 풍습 속에서 영감을 받으며 작품을 탄생시켰다. 잉카문명을 상징적으로 그린 그의 작품은 볼리비아뿐만 아니라 남미 여러 나라에서 100회 이상 전시되었으며 수많은 상을 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내 예술은 내 존재 속에서 태어났으며
내 작품은 대지의 신인 파차마마 속에서 탄생했다.


마마니 작품 전시관에 광장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식민지 풍의 아름다운 거리 하엔 거리가 나온다.



자갈로 덮은 스페인 풍의 하엔 거리는 볼리비아 독립투사 중 한 명인 하엔의 이름을 딴 거리로 여행자들의 포토 존으로 인기가 높다. 하엔 거리에 금은으로 만든 공예품을 전시한 황금 박물관과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을 접할 수 있는 악기 박물관 그리고 도시의 모형을 전시해 놓은 바르가스 박물관 등이 있다. 또한 볼리비아 혁명을 지휘했던 무리요 박물관이 있다.



무리요 박물관은 1809년 7월 16일 볼리비아 혁명을 지휘했던 무리요가 살았던 집으로 생전에 그가 사용했던 가구와 여러 가지 수집품을 볼 수 있다.


남미에서 천연자원이 가장 풍부한 나라지만 가장 가난한 나라 볼리비아는 원래 잉카제국의 영토였으나 1535년부터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았으며 1825년에서야 독립한다. 볼리비아라는 국명은 독립영웅 볼리바르의 이름에서 가져와 볼리바르의 나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 7월 24일 베네수엘라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럽 백인과 원주민 인디오 간의 혼혈아 집안 출신으로 그가 태어난 지 얼마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1799년 할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나 결혼하였다. 하지만 결혼 8개월 만에 사랑하던 아내마저 병사하자 실의에 빠졌지만 다행히 옛 스승 로드리게스를 만나 루소와 볼테르 등 서구 시민혁명의 거장들을 만나며 프랑스혁명에 심취했다.


이후 나폴레옹이 황제로 군림하며 라틴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하자 그는 모든 것을 바쳐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투쟁을 시작한다. 당시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 압박을 일삼았으며 본토 상품과 경쟁이 될 만한 식민지 상품을 강제로 생산을 중지시켰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식민지 수탈정책에 항거해 독립을 이룬 미국에 대한 환상을 품고 미국의 원조를 기대했지만 미국 역시 유럽과 마찬가지로 라틴아메리카를 장악하려는 속셈을 알고채고 오직 라틴아메리카인의 힘과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스페인과 싸울 혁명군을 조직해 스페인의 식민 정부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하며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그리고 베네수엘라 등 세 나라로 이루어진 그란 콜롬비아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해 페루와 볼리비아 독립투쟁을 진두지휘했다.


페루는 볼리바르의 지도 하에 헌법 초안 작성회를 개최한 후 초대 대통령으로 그를 추대했지만 그는 사양했다. 그러자 페루 당국은 그에게 선물로 120만 페소를 보냈다. 120만 페소를 받은 그는 한 나라에 자유롭지 못한 노예가 있다면 독립투쟁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하며 페루의 노예들을 해방하는데 받은 돈의 전액을 사용하였다. 당시 페루에는 약 3천 명의 노예가 있었고 노예 1인당 몸값은 350페소였다. 이후 볼리바르는 라틴아메리카 노예들의 대부가 되었다.


베네수엘라 독립 후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일부 제안에 대해 거부한 볼리바르는 1830년 12월 17일 47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당시 그는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다.


설사  자신에게 왕이라는 직함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그보다는 차라리 라틴아메리카 해방자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를 랍니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라는 칭호야말로 동료 시민들이 인간에게 부여할  있는 가장 숭고한 칭송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볼리바르는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모든 것을 바쳐 베네수엘라, 페루, 콜롬비아, 에콰도르, 볼리비아, 파나마 등 6개 국가를 해방시켰다. 그리고 그의 혼은 지금도 볼리비아에 살아 숨쉬고 있다.


하엔 거리 끝으로 가면 케이블카 정류장이 나온다.



스페인어로 케이블카란 뜻의 텔레 페리코는 라파즈 도시의 대중교통으로 세상에서 가장 높고 긴 케이블카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어 있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초록색 등 5개의 노선이 계곡과 능선을 따라 운영 중인 텔레 페리코는 지하철처럼 환승도 가능하며 저렴하다. 텔레 페리코에 몸을 실으면 라파즈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많은 관광객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이제 택시를 타고 최고의 전망과 야경을 자랑하는 낄리낄리 전망대로 향할 시간이다



라파즈 중심부에 위치한 낄리낄리 전망대에 오르면 산이 병풍이 되어 도시를 감싸고 있는 기상천외한 도시의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이곳 낄리낄리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찬란하다. 계곡 사이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히 들어선 집과 높은 빌딩 숲에서 쏟아내는 불빛이 칠흑 같은 공중도시의 어둠과 어우러져 여행자의 마음을 단숨에 제압하며 영원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마음속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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