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를 향한 십자군 원정

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36화

by 오래된 타자기


11세기말부터 시작된 동양으로의 십자군 원정이 결성된 근본 목적은 예수의 무덤을 둘러싼 지역에 대한 해방에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이 이슬람 세력에 정복당한 뒤부터 순례자들이 때때로 어려움에 직면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탓이죠. 실상 이 모든 문제는 그리스 인들과 이슬람 세력 간에 발생한 분쟁이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이슬람의 탁월한 칼리프들은 다소간에 있어서 종교적 관용을 베풀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새로운 사건이 터진 것은 이슬람 세력에 대한 교회의 성전이 포고되고 기독교도들이 이에 호응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다투면서부터였습니다.


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에 클레르몽에서 귀족 기사단에게 구원을 호소하기에 이르렀죠. 그리스도의 과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규칙을 위반해서는 안 되기에 수도원의 수사들은 제외하고 용병들을 동원하여서라도 성지를 탈환할 것을 제안하고 나선 것입니다.


교황은 그리스도 전사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군대’를 창안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리스도 전사들이란 용어는 실상 시토회 수도원장이었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1153 영면)가 자신의 저술 「새 기사단에게 바치는 송가」에서 사용한 개념입니다. 여기서 베르나르가 말한 성당기사단은 템플 기사단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전사들은 확신에 찬 상태로 주님께서 이끄시는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그들은 적들을 무찌르는데 따른 죄책감과 또한 그들이 죽음에 처할 위험마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것도 알고 보면 내게 닥쳐오는 것이긴 하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일은 어떠한 비난받을 일도 없는 오직 커다란 영광만이 함께 할 것입니다.”


<템플 기사단의 고관들>, 도나 루이즈 데 카스트로의 무덤, 빌랄카자르 데 시르가(Villalcázar de Sirga)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 교회.


어마어마한 병력을 자랑하는 십자군은 또 다른 종교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영토를 확보할 야심을 숨기지 않았죠. 유럽은 이미 경제적으로나 인구상으로 팽창을 거듭해 비좁아진 상태였습니다.


이에 비해 동방 세계는 서양의 노블레스(귀족층)에게는 드넓은 활동의 무대로 떠올랐습니다. 실제 동방은 약속의 땅이었고 그들의 꿈이 서린 정복 해야만 할 언약의 땅이었습니다. 도성 안에 사는 부르주아지(중산층) 또한 꽉 막힌 상업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그 무엇인가를 찾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템플 기사단의 출정, 크르싹(Cresac) 템플 교회의 프레스코 화, 1180년경. [1]


성지에서의 동·서양의 만남은 로마네스크 예술이 발전하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주둔지에서 십자군은 적들의 건축술을 유의 깊게 관찰한 뒤, 유럽의 제 왕국들을 요새화하는데 이를 십분 활용했습니다. 그 결과 십자군 성들이 혁신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죠.


더군다나 프랑크 왕국은 동양에 계속하여 주둔함으로써 동양의 건축술을 눈여겨보았고 앞으로 프랑크 왕국의 지방에 건설될 교회 건축물들의 모델이 될 만한 동양 건축물들을 점찍어두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유럽 곳곳에 지은 원형 건축물들이 바로 생 세퓔크르(Saint Sépulcre)라 불리는 예루살렘의 성묘 성당을 본뜬 교회 건축물들입니다. 이 새로 지어진 건축물들이 오리지널 건축물보다 더 상징적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에밀 시뇰(Emil Signol), <1099년 7월 15일 십자군 예루살렘 탈환>, 베르사유 궁전. [2]




[1] 전투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벽화는 십자군이 1163년에 보크께 평원에서 승리하고 되찾은 시리아의 카락크 성을 보여줍니다.


[2] 그림 속의 1이 바로 <성묘 성당>이며, 2는 반석 위에 세워진 지붕이 원형인 돔 대성당이고, 3은 예루살렘 성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