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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Dec 03. 2021

카페 왕조의 프랑스

앙드레 보느리가 들려주는 로마네스크 예술 이야기 40화

[대문 사진] 흘뢰리 수도원


프랑스 봉건제도 초기에 해당하는 카페 왕조 역시 전통 예술의 바탕 위에 새로운 양식의 예술을 접목했습니다. 프랑스는 카롤링거 왕조시대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은 곳으로써 값진 유적들이 아직까지 전해져 오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숫자로 따지자면 풍부한 내용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신선한 충격을 안길만한 문화유산은 독일어 권에 비해 상당히 적은 편입니다. 더군다나 위그 카페(987-996)와 그의 후계자들은 샤를마뉴를 계승한다고 천명하지도 않았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완성된 로마네스크 건축이 처음 시도된 것은 안타깝게도 프랑스로부터 해방된 론(Rhône) 강 지대였습니다. 게다가 잠시도 끊이지 않고 발생한 노르망디 인들의 침략과 약탈은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던 봉건제도 체계를 와해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같은 불리한 정치, 사회, 경제적 전후 사정에서 보듯, 진취적이고도 장대한 건축상의 새로운 시도는 거의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새로운 천 년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카페 왕조의 국왕들의 권위 또한 점차적으로 신장되었고 건축술에 있어서도 라울 글라베흐가 봄에 비유했듯이 기존의 건축물들과 대비되는 진정한 대항마가 햇볕아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생 베닌느(Saint-Bénigne) 대성당 지하교회 기둥 장식, 11세기, 디종(Dijon).


카페 왕조가 이끌던 프랑스 역시 새로운 양식에 입각하여 오랫동안 공들여 지은 수도원들만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노후한 건물들을 개량하는 수준에 머물러있었던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는 건축물들을 완성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변화를 보인 것이 제단의 증가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사제이자 수사였던 이들이 개인적으로 미사를 드리기 위한 필요성이 증대되자 점차적으로 증가 추세를 보였습니다.


11세기에 들어와서는 공동체들 안에서도 제단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공들여 제작한 제단은 마이욀(950-963) 수도원장 시절에 클뤼니 II 수도원 안에 새롭게 들어선 제단입니다.


새롭게 설치된 제단은 교회 내진 안쪽 깊숙이 자리했습니다. 제단에 덧붙여 벽 가장자리에 후진을 둘러싼 사다리꼴 모양의 작은 제단들이 이어졌죠. 중앙에 놓인 주제단을 감싼 형태였습니다. 그럼으로써 교회 후진 안 깊숙이까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고 후진은 복합적이면서도 유기적인 구조를 띠게 되었습니다.


후진에 자리한 작은 제단들은 건물 전체와의 조화를 추구한 결과로 응집된 형태를 보이는 구조로 설계되었고 작은 제단들 각각의 단일성을 충분히 고려한 각 등급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배열되었습니다. 이러한 설계에 따른 공식은 더욱 널리 퍼져갔으며 클뤼니 수도원의 모든 건물에 적용되기에 이르렀죠.


생 필리베르(Saint-Philibert) 수도원 지하교회(크립트), 11세기, 뚜흐뉘(Tournus).


또 다른 특징은 모든 이들이 열광적으로 심취해있던 종교적 제식이었습니다. 이 열광적인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어떤 체계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했죠. 라울 글라베흐가 증언했듯이, “구세주께서 강생하신 이래 천 년 가까이 되는 지난 8백 년동안 여러 다양한 징후들이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이러한 징후들은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성인들의 다양한 유골함들이 은닉된 상태로 방치되어온 성소 안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오랫동안 고대해온 영광스러운 부활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증언은 새로운 천 년이 다시 시작하던 때에 성골함이 갑작스레 증가하게 되었음을 설명해줍니다. 몇몇 성골함들이 보관되어 있던 수도원 교회에 어마어마하게 군중이 쇄도하자 오직 신자들만을 위한 교회를 다시 지을 필요성이 제기된 거죠. 더불어 신자들이 성인들의 유골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로 탄생한 것이 주제단이 위치한 내진을 감싼 형태로 들어선 순환형 회랑이며, 회랑에는 작은 제단들이 방사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후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0세기로 추정됩니다. 클레르몽 대성당에서 비롯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입니다.


이보다 조금 늦게 오흘레앙의 생태냥 성당이 그와 같은 방식을 채택하였습니다. 11세기 초반에 증축된 생태냥 성당은 경건왕 호베르 2세(996-1031)가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지은 교회입니다.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개축된 교회는 여러 개의 작은 제단들이 방사상으로 자리한 후진을 갖춘 건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오흘레앙 생태냥(Saint-Aignan) 성당.


오흘레앙 생태냥(Saint-Aignan) 성당의 순환형 방사성 후진 모습.


같은 시기에 성골함이 보관되어 있는 교회 재정이 넉넉했던 교회들은 한결 같이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여 교회를 개축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단 한 채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식으로 후진을 갖춘 건물들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죠. 이러한 폭발적인 성공 역시 기이한 현상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로마네스크 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성공을 거둔 것으로서 평가받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순환형 회랑에 방사상으로 설치된 작은 제단들을 갖춘 후진이 행복하게도 고딕 건축가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흘뢰리(Fleury) 수도원 교회 뒷부분, 12세기, 생 브누아 쉬흐 루아르(Saint-Benoît-sur-Loire).









루아르 강변에 자리 잡은 흘뢰리 수도원은 베네딕트 수도원의 창시자인 베네틱투스 성인의 성골함이 안치되어 있는 곳으로써 영성 깊은 수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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