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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없는 꼭대기층에서의 시작

by 세아


나는 흔히 생각하는 여자들의 결혼 적령기보다 일찍 결혼한 편이다.


한창 일하고 커리어를 쌓아야 할 이십 대 중반, 나는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직장 생활 전 실패했던 사업 때문에 신용이 좋지 않아 신용 회복을 하던 중이었고 나는 사회 초년생으로 모아둔 돈이 없었다.

친정에 빚이 많았기에 내가 버는 월급의 대부분을 친정 빚을 갚는데 썼기 때문에 따로 모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둘 다 형편이 안되는데 왜 그리 섣불리 결혼을 진행했을까 생각이 든다.)


그때는 갈 형편이 안되기도 했지만 아파트에 대한 로망도 없었기에 나는 신혼집으로 빌라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10군데의 신축빌라를 보았는데 뭐에 씌었는지 우리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꼭대기 층을 덜컥 계약하였다.

단지 우리가 보았던 다른 투룸보다 조금 더 넓다는 이유로 그 집을 선택했던 것 같다.

(집을 소개해 준 그 사람은 속으로 우리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다행히 나름 대기업 계열에 다닌다고 신용이 좋았던 나는 대출이 쉽게 나왔고 그 집을 매매했다.

지금이라면 그 돈에 조금만 더 보태어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평수의 아파트를 찾아 계약했을 텐데 돌이켜보면 너무 아쉬울 뿐이다.


시부모님은 엘리베이터 없는 꼭대기 층을 보며 나중에 힘들어서 어떡하려고 그러냐며 걱정하셨지만 젊었던 나는 아무 문제없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


그렇게 나는 결혼과 동시에 덜컥 임신이 되었고 그 집에서 신혼을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한 채 아기 키울 준비를 하게 되었다.


우리 집은 옥상 밑이라 한낮이면 30도가 넘을 만큼 절절 끓었는데 10월에 결혼하면서 에어컨 살 생각을 못 했던 우리는 다음 해 7월에 아이를 낳고 조리원에서 돌아오자마자 견디질 못하고 급하게 작은 평수의 벽걸이 에어컨을 달았다.


하지만 더운 걸 해결하자 이번에는 계단이 발목을 잡았다.

전에는 혼자 몸으로 계단을 가뿐히 오르락내리락했다면 이제 아기를 안고 다녀야 했다.

아기를 안은 채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며 두고두고 어머니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했다.


준비 없이, 계획 없이 시작된 결혼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처음엔 순탄하게 흘러갔다.

직장을 나와 다시 자기 가게를 차린 남편은 음식 맛이 소문나 가게 매출이 좋은 편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둔 나는 남편 가게에서 일을 도왔지만 임신 중기즈음 조산기를 겪으며 일 나가는 걸 그만두었고 자연스럽게 전업주부가 된 상태였다.


그때 남편이 주는 생활비는 넉넉했다.

아이가 없을 때, 아이를 낳고도 아직 돈 들어갈 일이 없을 때 우리는 더 빨리 많은 돈을 모으고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고 계획했어야 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남편은 남편 나름대로 자기가 벌린 일을 수습하고 새로 시작하는 가게에 신경을 써야 했기에 바빴고 나는 정말 경제 개념에 무심하고 미래를 계획하지도 않을 만큼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파트에 대한 로망이 없던 나는 우리 집 앞으로 들어서는 대형 아파트 단지 공사장 앞에서 큰 아이에게 포클레인과 트럭 구경을 시켜주며 처음으로 저곳에 우리 집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와 남편 둘이서만 살 때는 우리 집도 살기 불편하지 않다 생각했지만 아이들을 키우고 살다 보니 짐을 놓을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버거워졌다.

잠든 둘째를 앞으로 안고 업어달라 울며 올라오지 않는 첫째를 업은 채 짐까지 들고 5층을 오를 때는 이 집을 산 나 자신을 끝없이 원망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다니며 사귄 친구들이 전부 새로 지은 대단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땐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사는 곳과 내가 사는 곳의 차이가 너무나 와닿아 나도 저들처럼 저런 곳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갔다.


라에 살며 겼었던 고충과 아파트에 살지 못하면서 느꼈던 좌절감과 서러움이 많았고 그것 때문에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때면 괴로웠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말처럼 우리가 엘리베이터 없는 5층 꼭대기집에서 시작한 게 어쩌면 잘못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의 시작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었지만 이제는 조금씩 꼬여버린 실타래를 풀어나가려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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