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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칠마루 Jan 03. 2024

살면서 몇 가지 역할을 하게 될까?

요즘의 난 1인 3역

12월 27일 목요일 : 12,589걸음     


저녁 9시에 애들을 재울 때였다. 둘째가 목이 아프다는 말에 체온을 쟀더니 39도였다. 집에 있던 타이레놀을 먹이고 샤워 후 입었던 옷을 다시 벗겼다. 둘째는 어릴 때부터 열이 나면 열성경련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기에 큰 애보다 한 박자 빨리 해열제를 먹일지, 미온수 마사지로 열을 내릴지 결정해야 했다. 30분이 지나 다시 체온을 쟀으나 38.6도였다. 오늘 밤도 편하게 자긴 글렀다. 보통 4시간 간격으로 열 체크 후 해열제를 먹이면 그나마 38도 이하로 열을 관리할 수 있었다.      


오늘의 목표는 날이 밝아 소아과 진료를 받을 때까지 아이의 체온을 38도 이하로 낮추는 것이었다. 21시~00시, 00시~04시, 04시~08시 세 번의 교대로 나누어 열보초를 서야 했다. 아이들로부터 감기가 옮은 아내가 몸이 좋지 않아 00시~04시 시간을 맡고 나머지 시간은 내가 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시간을 나눠야 맘 편히 쉴 수 있다. 00시 열은 37.5도 둘째를 깨워 다시 이부프로펜 한 알을 먹이고 재웠다(아세트아미노펜과 이부프로펜을 3~4시간 간격으로 교차해서 먹이면 열이 잘 떨어집니다, 꼭 아이 몸무게에 맞춰 용량을 조절해서 먹여야 합니다). 아직 미온수 마사지까지 할 단계는 아니었다. 아내에게 인계 후 4시까지 편하게 잤다. 아내가 새벽 4시에 둘째에게 다시 타이레놀을 먹이고 재웠다. 체온은 38도였다. 다시 내가 8시까지 애를 돌볼 차례였다.      


7시 30분에 큰 아이를 깨워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8시 30분에 진료가 시작되는 소아과로 출발했다. 아침 일찍 병원에 오니 30분 만에 진료받을 수 있었다. 둘째의 증상은 다행히 목감기였다. 의사 선생님 曰 “독감은 해열제를 먹어도 1~2시간 이내 금세 열이 오릅니다. 또 몸살기운이 엄청나서 여기저기가 아프다는 표현을 합니다. 이럴 때 독감 검사를 하는 것이죠. 지금 둘째는 위 두 가지 중 아무것도 해당되지 않아 독감이 아닌 걸로 추정된다”라고 말씀하셨다. A형 독감으로 타미플루 먹은 지 고작 1주일밖에 안 지나 다시 다른 유형의 독감에 걸렸나 걱정했는데 그게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둘째의 소아과 진료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10시 30분쯤 큰 아이가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며 조퇴하겠다는 전화가 왔다. 큰 애를 데리고 집 앞 병원으로 갔지만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아이만 혼자 병원에 놔두고 가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사실 오늘은 아이 병원 진료로 12시까지 출근을 늦춰서 나 혼자 마음이 바빴다. 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45분, 적어도 11시 25분에는 회사로 출발해야 한다. 40분 만에 병원 진료를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 결국 큰 애 병원 진료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퇴근할 아내에게 미룬 채 속이 불편한 큰 아이가 먹을 죽만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빠른 속도로 출근 준비를 마치고 회사로 출발했고 결국 아내가 오전 수업 마치고 돌아온 이후인 오후 3시 넘어서야 큰 아이는 소아과 진료를 받았다. 다 나았다고 여겼는데 큰 아이는 다시 장염 약을 먹어야 했다.      


내가 회사에 출근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도착하자마자 출동벨이 거침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소방시설 오작동, 소화기로 자체 진화 등 화재 출동만 오후 내내 5건이 걸렸다. 다행히 큰 불은 없었지만 오늘도 무사히 지나가기를 맘속으로 기도했다.     


재활 운동으로 트레드밀 걷기 1시간, 코어운동 5가지(바이시클 크런치, 크런치, 다리교차 레그 리프트, 플랭크, 코브라 자세)와 맨몸 스쿼트, 맨몸 데드리프트 20분 동안 진행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몸을 움직이는 것에 중점을 뒀다. 또 수술한 발을 왼쪽, 오른쪽, 아래, 위 네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도 빠뜨리지 않고 각각 50번씩 총 200번의 발목 운동을 했다.     


12월 28일 금요일 : 3,510걸음  

   

보통 화재출동은 특징이 있다. 출동벨 소리가 울리기 전, 스피커에서 신고자든, 상황실 요원의 목소리든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퇴근 1시간 전, 느긋한 마음으로 믹스커피 한 잔을 즐길 때였다. 평소보다 세 배정도 빠른 상황실 요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량 화재 출동입니다. 차량 안에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00 펌프, 00 탱크, 00 구급, 지휘, 조사,...”  

    

마시던 커피를 책상에 내려놓음과 동시에 책상에 놓인 무전기 2대(UHF : 건물 내부 등 굴곡진 곳에서 통신 가능, 주로 화재 팀 소통에 많이 쓰임, PS LTE : 2014년 세월호 참사 후 재난 대응 기관의 공용 통신을 위해 만든 무전기, 지휘용으로 화재나 구조 현장의 지휘관이나 상황실에서 주로 사용)를 들고 내 담당인 물탱크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여기서 10km 떨어진 곳의 고속도로 터널이었다.      


터널을 빠져나와 활활 타오르는 벤츠


터널 안에서 불이 나면 유독가스로 인해 숨쉬기가 어려워지고 연기로 시야가 제한되는 경우가 많아 출발 전부터 슬슬 걱정이 앞섰다. 작고 재빠른 구급차가 앞서 현장에 도착한 결과 운전자의 빠른 대처로 불이 난 차는 터널 출구에서 200m 정도 벗어난 갓길에 정차되어 있다는 소식을 무전으로 들었다. 도착해서 보니 불이 난 차는 벤츠 CLS로 이유는 모르지만 타이어를 포함해 차의 앞쪽에 모두 불이 붙은 상황이었다. 20분 만에 차의 불길을 모두 잡았고 혹시 모를 잔불을 염려해 40분 정도 물을 뿌려 차량을 냉각시켰다. 약 1시간의 작업 끝에 차량 화재는 끝났지만 이제 뒷정리 후 다시 회사로 돌아가 교대까지 마치면 퇴근시간을 훌쩍 넘겼을 텐데, 이젠 집에 가서 기절하듯 잠자는 일만 남았다.      


12월 29일 금요일 : 9,264걸음     


쪼그려 앉을 때 다친 오른쪽 다리에도 몸무게를 싣고 버틸 수 있게 되었다. 한 10초 정도. 물론 양손으로 어딘가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래도 못하던 자세를 다시 할 수 있게 되어 혼자 기뻤다. 걸을 때도 발을 내딛고 뒤꿈치→가운데 발바닥→발가락 순서로 힘을 일정하게 줄 수 있게 되었다. 기존에는 앞꿈치에 힘을 주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이젠 다른 이와 90퍼센트 정도로 걸음걸이가 비슷해졌다. 걷는 속도 역시 5.5km/h까지는 문제없다. 하지만 아직 계단을 자유롭게 내려가는 일은 극복하지 못했다. 여전히 한 칸씩 내려가는 것이 최선이다.     


아이에게 옮은 감기가 낫지를 않고 1주일째 지속되었다. 아내에게는 몸살 기운과 목감기로, 내겐 노란 콧물과 침 삼킬 때마다 부은 구인두가 따가운 증세로 나타났다. 독감, 감기 환자가 많다더니 이비인후과 역시 30명 대기는 기본이었다. 1시간 넘게 기다려 겨우 진료를 받았고 아내와 나 모두 세균감염으로 인한 축농증, 감기로 진단받았고 항생제와 진통제 등을 처방받았다. 12월은 우리 가족에게 힘든 한 달이었다. 아이 대안학교 불합격, 두 아이의 연이은 독감과 감기, 뒤를 이어 우리 부부에게까지 옮아버린 감기까지 끝까지 쉽게 넘어가지를 않았다.   

  

오늘의 운동으로는 실내 자전거 워밍업 10분, 인터벌 2분 전력질주, 1분 천천히 총 10세트 마치고 1분 전력 질주, 1분 천천히 2세트, 쿨다운 16분으로 1시간을 채웠다.      


12월 30일 토요일 : 12,022걸음     


소방서도 출동만 없다면 주말엔 그리 바쁠 일이 없다. 행정업무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각자 좋아하는 운동을 하거나 쉬면서 대원 각자의 체력을 알아서 비축해 놓는다. 언제 출동이 걸릴지 모르니 운동을 하더라도 내 체력의 100퍼센트를 쓰지 않고 항시 출동 대기상태를 유지하고 쉬는 게 기본이다.     


이걸 시샘하듯 하늘에서 눈이 자꾸만 내렸다. 그것도 10시간 동안 10cm 가까운 눈이 차곡차곡 바닥에 쌓였다. 그 눈을 보면서 기쁨 대신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왜냐하면 그 눈을 치우는 사람이 나와 내 동료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눈이 내려 바닥에 쌓이면 당장 소방차가 출동하는데 지장이 생긴다. 그래서 눈이 내리면 사무실 앞 도로와 주변을 최대한 깨끗이 치우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누가 군대에서만 눈을 치운다고 했던가, 난 제대한 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눈과 싸우고 있다.      


아, 그래도 짜증 내지 않고 즐겁게 일하는 방법이 있다. 예전 TV에서 겨울철 최고의 운동량을 가진 게 무엇인지 방영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눈 치우기였다. 쉼 없이 움직이며 온몸의 근육을 써야 하는 제설작업은 해본 사람만이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 그리 넓지 않은 사무실 앞 도로를 치우면서도 10시간 동안 거의 9,000걸음을 걸었다. 이왕 운동할 거 지금 생각한다고 여기면서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면 그나마 수월하게 느껴진다.     


저녁 9시가 지나 얼추 눈이 그치고 제설작업까지 마무리되었다. 이젠 편히 쉴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주변에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난다며 신고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출동을 나가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불이 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간혹 아스팔트 포장 작업을 할 때 타는 냄새가 난다며 신고하는 경우가 생각났다. 상황실 문의 결과 인근 지역 자동차 수리 공장에서 불이 나 그 냄새가 여기까지 퍼진 걸로 추정된다는 내용을 들었다. 신고자에게 이 내용을 설명하고 출동을 마쳤다. 그렇게 눈과 함께 보낸 하루가 지나갔다.


제목 이미지 출처 : 영화 23 아이덴터티(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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